INTERVIEW- 차붐 챕터 1 ‘예능하다 온 쇼미더머니 777’
2015년 여름, 미국에서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튼’(Straight Outta Compton) 이란 영화가 개봉됐다. 미국 힙합 웨스트코스트 씬의 전성기를 이끈 전설과도 같은 인물들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이 된 ‘컴튼’은 흔히 말하는 슬럼가다. 그 곳에서의 삶은 거칠었지만 이를 자양분 삼아 성장한 랩퍼들은 지금도 컴튼을 ‘샷 아웃’(Shot out)한다.
그런데 컴튼과는 머나먼 한국 땅에서, 그것도 금요일 밤 가장 많은 이들이 보는 케이블 TV쇼에서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안산’을 외친 랩퍼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차붐이다. 안산에서 나고 자라 랩퍼가 된 그이기에 그 한 마디는 어색하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이던 2000년 백업 랩퍼로 첫 무대에 오른 차붐은 10장이 넘는 콜라보 앨범에 참여하고 두 장의 솔로 앨범-2014년 1월 정규 1집 ‘Original’, 2017년 7월 EP ‘Sour’-을 발표한 베테랑 랩퍼다.
안산 거리의 삶을 말하는 차붐, 그와의 인터뷰를 전한다.
차붐이라는 랩 네임을 사용한다. 유명한 이름임에도 굳이 사용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차붐이란 이름에 대해 여러 이야기들이 있는데, 축구를 잘해서 얻은 이름은 아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끼리 ‘홍씨면 홍명보, 차씨면 차붐’ 그런 식으로 별명을 부르다 보니 내 별명이 ‘차붐’이 됐다. 무대에서 더블링 치는 하이프맨으로 시작한 게 2000년이다. 그때는 차붐의 알파벳에서 따온 ‘CB’로 활동했는데 사람들이 발음하기 어렵다고 하더라. 그래서 ‘차붐’이란 별명을 랩 네임으로 쓰게 됐다.
2000년 랩퍼로 데뷔했으며, 한국힙합 1세대가 활동했던 클럽들을 가사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선 힙합이라는 음악 자체가 낯설었다. 어떻게 힙합을 접하게 됐고, 또 랩퍼가 됐나.
1990년대 후반 일본 음악이 인기 있던 시절, 차붐이란 별명을 지어줬던 친구와 아무로 나미에, 우타다 히카루, 엑스재팬 등등의 뮤지션들을 공유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가 힙합을 듣고 있더라. 그때 모뎀으로 연결해 접속하는 PC통신도 유행했었는데, 유니텔에서 ‘WORD-UP’이란 클럽에 가입하면서 힙합에 빠져들게 됐다. 따로 녹음할 공간이 없어 형들 녹음할 때 틈틈이 녹음도 해보고 그 결과물을 힙합커뮤니티 사이트인 밀림닷컴에 올렸었다. 그러다 형들 무대에서 하이픈 엠씨로 더블링 치면서 무대에 처음 서게 됐다. 형들 따라서 힙합클럽 대전 아폴로나 부산 BBF까지 다녔으니 멀리 다니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무대에 오른 셈인데, 그 후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유학을 다녀 오기도 했다.
부모님께서 “외고 가면 유학 보내준다”고 하셔서 한달 반 동안 진짜 열심히 공부했다. 그 덕에 듣기평가 만점 받고 과천외고를 갔다. 입학 후 힙합음악 동아리를 들어갔는데 난 이미 무대를 뛴 경험이 있다 보니 대회 등에 나가면 상금을 타곤 했다. 그렇게 지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유학을 가게 됐다. 가서 곡을 만들려면 MPC가 필요했는데 “악기 사주시면 집에서 음악이랑 공부만 한다. 사고 안 치고 열심히 산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래서 MPC 하나 들고 2002년 캐나다로 떠났다.
2005년 말에 돌아왔는데, 2006년 다른 사람의 앨범에 피쳐링하며 처음으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그때를 실질적인 데뷔로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2007년엔 빅스몰 님의 앨범(2008년 발매) 다섯 곡 전체를 프로듀싱 작업했고 피쳐링으로도 3곡 참여했다. 2008년엔 제이락킨 & 차붐 믹스테입도 발매했고. 그러다 눈에 띄어서 힙합씬에 들어오게 됐다.
2018년은 차붐이란 랩퍼를 울려 퍼지게 한 해이기도 하다. 쇼미더머니(이하 쇼미)를 통해서. 차붐과 쇼미는 쉽게 떠올리기 힘든 조합이었다. 출연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나.
길랭-바레증후군(근육이 쇠약해 지거나 마비되는 질병)에 걸리지 않았으면 안 나갔을 거다. 마비 증상이 처음 왔을 때는 가벼운 목 디스크 정도로 여겼는데 다음날 걷는 것이 불편할 정도로 악화됐다. 그래서 대학병원에 가보니 ‘파킨슨병으로 예상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중에 길랭-바레증후군 진단을 받긴 했지만. 어쨌든 병원을 나와서 검색 해보니 파킨슨병 환자의 기대수명이 5년도 안되더라.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거리를 걷는데 2017년 쇼미에서 발표됐던 ‘N분의 1’이 들리더라. ‘죽을까 말까 하는 상황에선 쇼미 나갈까 말까하는 고민을 왜 한 건지’라는 생각이 들며 헛웃음이 나왔다.
웬만한 뮤지션들이 다 나와서 2018년의 쇼미 777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래서 한번은 나가보고 싶었다. 나갔다 와봐야 욕을 하던 뭘 하던 판단할 수 있으니까. 여러 부분이 맞아 떨어져서 쇼미 출연을 결심했다.
쇼미 출연을 두고 일부는 ‘안산 느와르’ 등을 통해 주류 자본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던 차붐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사업을 하면서 쇼미, 힙합씬, 그리고 대중가요를 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졌다.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는 무언가를 지킨다고 얘기한 적이 태어나서 한번도 없다. 곤조나 줏대가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예를 들어, 어제는 초콜릿이 맛있었는데 내일은 맛이 없으면 당당하게 “맛이 없다”라고 말할 거다. 욕 먹을 수 있겠지. 누군가 “어제 오늘 그렇게 바뀌는 게 좀 아니지 않냐”고 하면 “그래, 내가 아닌 거겠지”라고 말할 거다.
사람은 여러 경험 등에 의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자기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쇼미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쇼미는 시장을 예상보다 더 크게 확대시켰고 쇼미 통해서 돈 버는 사람도 생기면서 ‘좋은 면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고 싶다’는 가사를 자주 쓰긴 했지만 힙합으로 돈을 벌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진짜 몰랐다. 그 점은 오히려 자랑스럽다.
희귀질병을 앓았다는 사실이 쇼미를 통해 공개됐다.
쇼미 예선 지원 영상을 찍을 당시 하체는 아주 잠깐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긴 했지만 전반적인 몸 상태는 여전히 안 좋았다. 사전 심사를 통과한 후 1차 예선과 관련해 연락을 받았는데, ‘1차 예선 날 10~12시간 동안 버티지 못 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컸다.
그 와중에 1차 예선날 우리 조에서 제일 마지막 순서로 심사를 봤다. 줄을 섰다가 힘들어서 잠시 빠져 나왔는데 그 사이 마지막 순번이 돼있더라. ‘이렇게 된 거 그냥 쉬자’ 그러고 6~7시간 동안 자다가 일어나고 그랬는데, 누워있다 눈을 뜨면 카메라가 날 찍고 있더라. 지원 목적에 ‘재활’이라고 썼었고, 제작진도 내 몸이 안 좋은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작진이 병자 컨셉을 잡고 내게 동정과 연민을 심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게 내 약점으로 비춰지는 것은 싫었다. ‘예선 불구덩이에 떨어지더라도 약점이 노출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딱 떠오르더라. ‘개그다, 방법은 그거 밖에 없다’. 그때부터 랩보다 예능에 집중하게 됐다.(웃음) 쇼미777 시즌에서 예능하다 온 거의 유일한 사람이지 않을까.
쇼미 예선 중 프로듀서 팔로알토가 차붐의 커리어를 설명하자 “꽤 나쁘지 않은 랩퍼죠”라고 답하는 등 중간 중간 위트 있는 멘트나 행동들이 돋보였다. 사전에 준비한 것인가, 현장에서 나온 애드리브인가.
전부 애드리브다. 준비한 건 하나도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조차도 잘 모르는데.(웃음) ‘내 음악을 보여주겠다’라는 뜻을 갖고 참가한 뮤지션들은 진중한 자세로 임했을 거다. 근데 난 개그나 하고 있으니 ‘쟨 저기서 왜 저러고 있지’하고 놀랐을 거다. 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쇼미 이전의 활동들을 통해 음악적인 부분은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하지 않았던 나만의 스타일도 보여줬고.
나한테 필요했던 건 대중과의 거리감을 좁히는 것이었다. 쇼미는 서바이벌 예능의 성격도 지닌 프로그램이다. 쇼미를 통해서 예능적인 부분을 어필하고 싶었다. ‘최대한 살아남고 최대한 예능한다’라는 각오로 잘해낸 것 같다. 오히려 ‘이럴 줄 알았으면 음악도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생각은 좀 있었다.
패자부활전을 통해 쇼미 본선에 진출했다. 패자부활전에 대해선 ‘짜고 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있다.
전혀 아니었다. 진출자와 탈락자는 다른 공간에 머물렀고, 난 패자 인터뷰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패자부활전을 하게 됐다. 호명되는 사람은 이 방에서 나가라”는 소리가 들렸고, 그 중에 내 이름이 포함됐더라. 그때가 쇼미하면서 가장 긴장됐던 순간이었다. 패자부활전에서 쓸만한 벌스(가사)가 없었으니까.
대다수 랩퍼들은 10개 BPM에 벌스를 맞춰올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했는데, 난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급하게 나간 거라 벌스 달랑 몇 개만 들고 나갔다. 심지어 입원해 있는 동안 공연을 쉬어서 가사도 다 까먹었었다. 3차 예선 탈락 할 때도 완벽하게 숙지하지 못한 가사 들고 나갔다가 다 날려서 졌었고. 갑자기 패자부활전이라 그러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주어졌나. 그래서 휴대폰으로 멜론 키고 ‘차붐’ 검색한 다음 빨리 외울 수 있는 것 찾아서 급하게 외웠다. 또 하나 고백하자면 패자부활전 때도 절지는 않았는데 가사를 좀 틀렸다. 결과가 잘 나오긴 했지만.
쇼미 프로듀서였던 넉살과 함께 했던 본선 1차 무대는 둘의 콜라보를 기대했던 팬들에겐 큰 선물이 됐지만, 차붐이 방송에서 보여줬던 이미지에 비해 차분한 곡이었다.
완전히 솔직하게 말하겠다. 본선 1차에서 할 노래는 아니었다. “그 비트를 하고 싶지 않다”고도 말했었다. 본선 1차 경연에서 루피를 이기려면 무조건 터지는 곡을 했어야 했다. 루피가 스타일 상 칠한 바이브의 곡을 갖고 나올 가능성이 높아서 그걸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타이트하게 터지는 곡을 갖고 가는 게 전략적으로 맞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딥플로우-넉살 프로듀서는 “네 색깔을 보여주는 것이 맞다”고 했고, 비트 선택 권한은 딥플로우-넉살 프로듀서에게 있었다. 당연하지만 얘기지만 뮤지션이 그 의견에 따르는 게 맞다. 그럼에도 마음 한 켠엔 ‘이 비트를 들고 나가면 백퍼 진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래서 제목을 ‘죽어도 좋아’라고 지었다. 아이러니한 건 리허설 때 루피 곡을 처음 들었는데 제목이 ‘Save’더라. 살려달라는 사람과 죽어도 좋다는 사람, 제목 따라 갔다. 그리고 루피의 ‘Save’가 진짜 좋기도 했다. 내 스타일대로 최상의 컨디션으로 붙었어도 이긴다는 확신을 하진 못 했을 거다.
물론 ‘죽어도 좋아’ 작업도 재미있었다. 쇼미가 아니었다면 선우정아 씨와 작업할 기회나 있었을까. 넉살과는 음악을 오랫동안 해와서 딱히 새로운 조합은 아니었지만 같이 무대에 서 본 적도 있었고 콤비네이션도 나쁘지 않았다. 완전히 내 스타일의 곡은 아니었지만 ‘죽어도 좋아’는 좋은 곡이었다.
어렵게 본선까지 갔는데 탈락이 빠르진 않았나.
루피랑 붙게 된 순간 ‘끝나겠구나, 여기까지구나’ 알고 있었다. 실력적으로 밀린다는 생각은 당연히 하지 않았고, 루피의 팬덤이 엄청나더라도 뒤집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쇼미가 방영되기 전부터도 루피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다. 본선 직전의 디스배틀도 쇼미가 방영 되기 전에 촬영됐지만 사람들이 루피를 보고 환호하더라. 그만큼 팬들이 많고, 팬덤이 두텁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쇼미는 대중이 투표하는 본선 경연부터가 더 공정하지 않나. 그전의 프로듀서 평가 때 조작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라고 하는데 심사위원 프로듀서들은 힙합음악을 하는 사람들이고 음악적인 커리어가 달린 일이다. 시스템 상 제작진이 프로듀서에 간섭할 수도 없다. 프로듀서가 누구랑 친하다고 도와주는 모습이 방송에 나가면 치명적이다. 어떻게든 투명하게 가려고 엄청 노력한다. 프로듀서의 취향에 맞지 않더라도 실력이 검증되면 선택하는 곳이 쇼미다. 그런데 대중이 관객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는 인기투표가 된다. 쇼미 경연은 대체로 평일날 촬영되는데 그 자리에 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나. 엄청난 팬심을 갖고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투명하게 투표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누굴 뽑을지 결정하고 온다.
난 얼마 전까지 아이돌 회사 대표를 했었다. 지금의 힙합 팬덤은 아이돌 팬덤, 더 정확히는 남자아이돌 팬덤과 똑같다. 팬덤이 움직이는 성향, 소비하는 패턴 등. 팬들은 “우리 오빠 나온다”고 하면 뭉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러한 팬덤을 폄하할 마음은 전혀 없다. 힙합씬의 성장에 기여하는 부분이 분명 있으니까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다.
개인적으론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팀 미션 곡 ‘패’ 작업으로 홍콩을 다녀온 후 너무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었다. 계산해보니까 10회가 엔딩인데 본선 무대 오르면 8회까지 나가더라. 우승할 것도 아닌데 보여줄 만큼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패’를 프로듀싱한 마일드 비츠 형과는 오랫동안 활동해온 사이다. 추천하거나 선택할 권한은 없었지만, 편곡이 바뀌는 과정에서 그렇게 됐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가 하는 음악은 TV에 나올만한 것이 아니다. 근데 정말 사람 오래 살아 봐야 안다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TV쇼에서 마일드 비츠 형 비트 위에 랩할 줄은 몰랐다. 그때 ‘이거면 만족한다’ 싶었다.
쇼미 출연 이후 인지도가 높아졌다. 바뀐 삶을 체감한 사례가 있나.
어마무시하게 체험한다. 난 대중의 인지도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홍대나 공연장이 아니라면 알아보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으니까. 이제는 동네 슈퍼를 가도 알아보신다. 모든 사람들이 안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쇼미를 시청한 10대~30대 분들은 나를 알아보신다. 다행히도 호감형 캐릭터로 봐주셔서 다들 좋아해 주신다.
쇼미 출연에 대해 후회하지 않나.
후회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원래 후회를 안 하는 편이다. 망했을 때도 많았지만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고민 없이 본능대로 가진 않는다.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하면 후회 없이 계획대로 밀고 나간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