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차붐 챕터 3 ‘한 챕터의 끝을 알리는 Sweets and Bitters’

2015년 여름, 미국에서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튼’(Straight Outta Compton) 이란 영화가 개봉됐다. 미국 힙합 웨스트코스트 씬의 전성기를 이끈 전설과도 같은 인물들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이 된 ‘컴튼’은 흔히 말하는 슬럼가다. 그 곳에서의 삶은 거칠었지만 이를 자양분 삼아 성장한 랩퍼들은 지금도 컴튼을 ‘샷 아웃’(Shot out)한다.

그런데 컴튼과는 머나먼 한국 땅에서, 그것도 금요일 밤 가장 많은 이들이 보는 케이블 TV쇼에서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안산’을 외친 랩퍼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차붐이다. 안산에서 나고 자라 랩퍼가 된 그이기에 그 한 마디는 어색하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이던 2000년 백업 랩퍼로 첫 무대에 오른 차붐은 10장이 넘는 콜라보 앨범에 참여하고 두 장의 솔로 앨범-2014년 1월 정규 1집 ‘Original’, 2017년 7월 EP ‘Sour’-을 발표한 베테랑 랩퍼다.

안산 거리의 삶과 그에 대한 애증을 말하는 차붐, 그와의 인터뷰를 전한다.

‘아오이 소라’란 싱글을 1월 4일 발표했다. 이 곡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해 달라.
전신마비로 병상에 누워있을 때 유일하게 생각한 아이디어다. 침대에 누워있어야 하는 상황이 슬펐는데 ‘푸른 하늘 은하수’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푸른 하늘하면 아오이 소라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오이 소라는 한국말로 푸른 하늘을 뜻하니까. 어렸을 적 컴퓨터 바탕화면 배경이 아오이 소라의 사진이었는데, 그 위에 내가 작업해 놓은 음악 파일들이 겹쳐져 있던 장면이 오버랩되더라. 물론 배경화면이 야한 사진은 아니었다.(웃음) 아오이 소라가 나를 푸른 하늘 아래의 세상으로 데려가 준다고 생각하니 재미있더라.
작업이 진행되면서 아오이 소라 씨를 자켓에 실으려고 연락도 했다. 아오이 소라 씨가 임신 중이었을 땐데 담당 에이전시 측으로부터 ”아오이 소라 씨가 출산 전까지 활동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아오이 소라 씨가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더라.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봤으면 좋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오이 소라’라는 이름을 쓰지 말라는 얘기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오이 소라’는 이전의 차붐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분위기가 묻어나는 것 같다.
담백하고 지극히 사적인 가사를 썼으며, 가사를 들어보면 제목을 왜 ‘아오이 소라’로 지었는지 충분히 설명이 된다. 그런데 굉장히 씁쓸했던 것은 음악을 제대로 안 들어본 분들이 “어그로나 끌려고 병o”이라는 심한 욕을 하시더라. 메갈리아, 워마드 등 여초커뮤니티 분들이 좌표 찍고 온 듯 한데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아오이 소라’ 싱글을 발표한다고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때 디엠을 많이 받았다. “젠더감수성이 부족하시네요. 실망스러워요. 팬심으로 이겨내려 했지만 이제 포기합니다”라는 식의 메시지들. 그래서 “어떤 부분들이 실망스러운 거예요? 유명 배우의 이름을 쓴 것 때문인지, 아니면 그 분의 특정 직업 때문인지 알려주세요. 제가 내놓았던 그 어떤 곡보다도 듣기 편하실 거예요. 듣고 나서 판단해주세요”라고 일일이 답변을 드렸다. 그런데 하고 싶은 말들만 하고 대화를 끊으시더라.
아오이 소라 씨는 배우 은퇴 이후 방송인으로 여러 활동을 해오며 건강한 에너지를 발산했다. 또한 여성 인권과 한일 양국 관계에 대해서도 발언해오셨다. 나도 가사를 쓰면서 성적인 이미지를 전혀 넣지 않았고, 아오이 소라 씨가 곡을 듣고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개인적으론 매우 의외였고, 또 실망스러웠다.

쇼미 출연 이후 거친 단어를 사용하던 랩퍼들이 언어를 순화하거나 노선이 변화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앞으로 나오게 될 차붐의 결과물은 대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마니아 층을 위한 것인가.
삶의 여러 변수들이 음악적인 방향성에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치지만, 내 삶이 어떻게 흘러갈 지는 나도 잘 모른다. 앨범도 발매 전까지 수많은 변화를 겪을 것이기에 완성되기 전까진 뭐라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사전에 어떤 층을 겨냥하고 음악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동안 리스너의 눈치를 보고 앨범을 만든 적은 없다. 현재 한국 힙합씬의 팬층은 남자 아이돌그룹 팬층과 유사한데 그들이 관심 가질만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을 거다. 그들에겐 ‘다른 종류의 멋’을 보여주고 싶다. 음악을 열심히 해도 얻지 못했던 인지도를 쇼미를 통해서 얻었다. 이제는 “제 음악도 좋은데 한번 들어보실래요”라며 권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않았나. 결과물이 웰메이드인지 혹은 구린 것인지에 대해선 신경이 쓰인다. 대중이든 마니아든 어느 레벨을 뛰어넘으면 다 만족시킬 수 있으니까.
언어는 내 음악을 표현하는 수단이라 크게 바뀌진 않을 것 같지만, 내가 나이를 먹어가고 있고 또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으니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는 있을 거다. 10대 후반 친구들이 용기를 가졌으면 하는 음악들을 만들어 오기도 했는데 19세 미만 청취불가 판정을 받아서 그 친구들이 들을 수 없었다. 그 부분이 조금 안타까웠는데 듣고 싶은 친구들은 어떻게든 듣지 않을까.(웃음).

앞으로 내놓을 음악이 대중이 바라는 그것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인가.
대학원 수업 때 교수님께서 하신 말이다. 어느 기업이 기존에 없던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싶어서 대중을 상대로 ‘무엇을 만드는 것이 좋을까’ 설문조사 했고, 그 결과를 반영한 상품이 출시됐는데 결과는 처참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어떤 실물’을 보기 전까진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무언가는 그들이 바랐던 모습과 달랐을 것이다. 무형의 콘텐츠인 음악은 그런 면이 더 두드러진다. 뮤지션에게 ‘어떤 음악’을 바란다면 “이미 존재해 있는 음악을 찾아서 들으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평생 음악만 듣고 살아도 다 듣지 못할 만큼 세상엔 좋은 음악들이 넘쳐나며, 그 중에서 본인의 취향에 맞는 것을 듣는 게 낫다는 얘기다.
내 음악을 듣기 전까진 이런 음악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분들이 많으셨을 거다. 앞으로 내놓을 결과물들도 사람들이 쉽게 예측하지 못했던 것들이 될 것이다. 이 시대에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과거의 유산들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아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 길을 잘 알고 있고, 또 가고 있다.

EP ‘Sweets and Bitters’가 곧 발매된다. 어떤 뮤지션들과 작업했는가.
5월말로 예정돼 있었는데 좀 더 연기될 것 같다. ‘Sweets and Bitters’ 발매 두 달 뒤엔 EP 혹은 정규 앨범을 낼 계획이며, 작업도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또 두 달 뒤에 새로운 앨범을 발매할 계획이다. 그렇게 세 장의 앨범을 내놓으며 2019년을 마무리 할 것 같다. 음악만 온전히 하고 있는 게 태어나서 처음이다.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니까 그 사이에 최선을 다해서 더 많은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다.
곧 나올 EP 앨범은 마진초이가 전곡을 프로듀싱 했다. 전작들에선 피쳐링을 많이 안 썼는데, 이번엔 의외다 싶은 피쳐링들이 포함돼 있다. 4~5명이 한 곡 당 한 명씩 참여한다. 맛 시리즈의 두번째 EP인 ‘Sweets and Bitters’를 통해 지금까지 냈던 앨범 중 사적인 이야기를 가장 많이 담았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부각시킬 수 있는 피쳐링들을 많이 썼다. 아직 전부 확정된 건 아니지만 많은 분들이 예상하는 피쳐링은 없을 것이다.

‘Sweets and Bitters’에선 어떤 이야기를 다루는가.
‘Original’과 ‘Sour’ 이후의 개인적인 이야기다. ‘Sour’는 맨 처음 작업할 때는 부자였다가 결국 망했고, 많은 분들이 아시듯 쇼미에도 나갔다. 새 앨범은 ‘현재 차붐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말한다. 이번 앨범은 차붐이라는 뮤지션의 한 챕터를 끝내는 앨범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다.
전작들에서 내 동네 ‘안산’을 때론 가볍게 때론 진지하게 바라봤다면, 이번엔 내 안의 진지한 얘기들을 꺼낸다. 가사를 쓰면서 시선이 더 높고 넓은 곳을 바라보는 식으로 확장된다고 하는데, 나는 차붐이라는 사람의 내면을 파고 들어가면서 하기 싫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내게 되더라. ‘목-가슴-배-하반신’의 경로를 따라 위에서 아래로 점점 더 깊숙이 내려가지 않을까. ‘Sour’의 ‘소주가 달아’나 ‘몇밤 더 자고가’의 가사를 쓰면서 가슴 정도까지 내려갔는데 이번 앨범에선 가슴 아래 명치까지는 도달한 것 같다. 그 다음 앨범에선 더 내려가야 하는데 갈수록 더 스트레스 받을 거다. 늘 간지나는 척하고 숨겨왔던 얘기들을 해야 하니까. 겁이 많이 나기도 하지만 꺼내고 나면 속은 시원할 것 같다.

차붐이란 사람의 발 끝까지 내려가는 가사를 쓰는 것이 목표인가.
단 한 곡만이라도, 그게 안 되면 열여섯 마디 벌스 하나라도 내면의 끝까지 들여다보는 가사를 쓴다면 음악을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뮤지션으로서의 수명을 앞으로 2~3년, 길어봐야 5년으로 보고 있다. ‘그 기간 안에 그걸 끄집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은 들지만, 나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중들이 이제야 날 알기 시작했으니 이제 막 한 살이 된 셈이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격언이 있는데, 내 직업은 ‘박수 칠 때 떠나는 직업’은 아니라 ‘잊혀지는 직업’이라 생각한다. 5년이란 기간은 그만큼 더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때쯤 잊혀지지 않을까라는 이야기다. 더 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렵겠지. 속된 말로 ‘벽에 똥칠할 때까지’ 하고 싶다. 2~3명 만이 나를 기억해주더라도 해내고 싶다.

랩퍼로서의 수명에 대해 얘기했는데, 미국은 나이와 상관 없이 리스펙 받는 랩퍼들이 많다. 반면 한국에선 랩퍼들의 수명이 짧은 편이다.
힙합은 트렌드가 빨리 변하는 장르이며,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로 빠르게 변하는 나라다. 이 두 가지 원인이 합쳐졌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단점이 있는 만큼 장점도 있다. 랩퍼들도 살아남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한다. 대표적으로 빌스택스(바스코) 형님이 있지 않나. 팔로알토, 스윙스, 더콰이엇, 도끼, 빈지노, 이센스 등의 뮤지션들도 그런 소리를 안 듣는다. 미국의 스눕독(Snoop Dogg), 나스(Nas), 버스타 라임즈(Busta Rhymes), 제이지 등과 같이 클래스를 보여준 랩퍼들은 변치 않는다. 대신 그 단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내가 그 단계까지 올라간다면 더 오래할 수 있지 않을까.

차붐도 자신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올라간 것 아닌가.
글쎄,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웃음) 스스로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진 않는다. 내가 스스로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하더라도 뮤지션으로서의 수명과 차붐이란 아티스트의 인기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평가하는 것은 대중이고, 그 평가는 냉정하다. 난 오로지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다만 내가 최선을 다한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라이브 퍼포먼스가 뛰어난 랩퍼 중 하나다. 신보도 연이어 나온다. 공연 계획은 없는가.
새 앨범이 나오면 쇼케이스를 할 예정이었는데, 바로 연달아 작업하다 보니 힘들 것 같다. 앨범 한 장 더 내고 할까 싶기도 한데 정확한 계획은 없다. 봄이 되면서 페스티벌도 열리기 시작했는데 작업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웬만해선 나가기 어렵더라. 2월 중순까지 약 반년 동안 일주일에 3~4번씩 공연했었다. 이제는 좋은 앨범을 만들 때라고 생각한다. 좀만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여름 지나고 날이 선선해질 때 즈음 단독 콘서트나 레이블 콘서트 등으로 많은 분들 찾아 뵙도록 하겠다.

중국에선 아이돌 기획사를 했고, 정치 시사쇼에 패널로 나간 적도 있다. 연기를 공부했으며, 독립영화에도 출연했다.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원래 잿밥에 관심이 많다.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것들은 해봐야 하는 성격이다. ‘앞으로 뭘 해야 되나’ ‘뭐가 재미있을까’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유튜브를 빨리 시작한 편이다. 세상일에 관심이 많아서 ‘시사발견댓글쇼’도 해봤다. 괜찮은 콘텐츠가 있으면 바로 진행한다. 수익적인 측면에서 보험을 여러 군데 들어놓은 것도 있다. 언제 어떤 게 터질지 모르고, 꼭 음악으로만 돈을 벌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레이벡 레코즈의 대표를 맡고 있다. 한 명의 랩퍼로 작업하는 것과 레이블 대표로 회사를 운영하는 것, 어떤 차이점이 있나.
완전 스타일이 다르다. 회사를 운영할 때는 레이블 뮤지션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의 장점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그래서 그 친구들과 평소에 많이 대화하며 서포트 하려 한다. 그에 따른 책임과 부담감은 있다. 레이블 친구들이 음악을 잘하더라도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친구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더 홍보하고, 그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다.
내 음악을 만들 때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먼저 고민해 본다. 경력이 쌓이다 보니 해답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지만, 가사 쓰는 게 제일 재미없다.(웃음)

싸드 이슈가 터지기 전 중국 아이돌 기획사의 대표와 현재 운영하고 있는 레이백 레코즈의 대표,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레이백 레코즈. 중국에선 학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학원이 잘되면 엔터테인먼트 사업도 해볼까’ 했는데 운 좋게도 반년 정도 후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아이돌 회사를 운영할 때는 ‘내가 성공해서 번 돈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흑인음악 레이블을 만들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아이돌 사업이 내가 가장 잘하는 분야가 아니었다. 레이블의 뮤지션과 호흡하는 것과 아이돌을 육성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기도 했다. 어쨌든 단계별로 밟아와 내 최종목표 레이백 레코즈를 설립했다.

침몰해가는 배에 타는 것을 즐긴다고 한 적이 있다. 빅딜이란 배에 올라탄 사실상 마지막 멤버였으며, 중국 진출 호황기의 끝 무렵에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금전적인 손해를 봤다. EP 앨범 ‘Sour’의 자켓은 비타민제로 유명한 ‘레모나’를 패러디 했었는데, 레모나를 만든 제약사도 상장폐지 될 위기에 처했었다.
주호민 작가님이 파괴하시는 분이라면 난 파괴되고 있는걸 보고 올라타는 사람이다. 주호민 작가님 정도의 연륜과 능력도 없고. 다 웃자고 한 얘기다. 빅딜이 무너지고 있는걸 알았지만 사람들이 좋으니까 잠시라도 함께 해보고 싶었다. 한류는 문이 닫히는걸 알면서도 호기심 때문에 경험해보고 싶었다. 어느 정도 결론이 정해져 있어서 남들이 안 하려고 할 때 문을 열고 들어갔고, 덕분에 기회도 생겼다. 나름의 자부심도 있다. 그 안에서 어떻게든 먹고 살았고, 또 무언가를 얻었으니까.
레모나 얘기는 처음 듣는데, 씁쓸하네요.(웃음) 앨범 자켓에 대해 부연설명하자면 내 앨범의 모든 자켓은 핀업 걸 아티스트 헬독 형님이 만들어주신다. 앨범의 제목 따라 ‘Original’ 때는 프링글스 오리지날맛을 패러디하고 ‘Sour’ 때는 스키틀즈 신 맛(사워)을 패러디하려고 했다. 그런데 헬독 형님이 “네 음악을 볼 때 한국적인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셔서 생각을 바꿨다. 그래서 ‘Original’은 형님의 그림 위에 실제 촬영한 사진을 더했고, EP는 레모나를 패러디했다. 새로 나올 ‘Sweets and Bitters’엔 어떤 제품이 패러디 될 지 기대해주셨으면 좋겠다. 자켓 아트워크도 앨범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니까.

어떤 뮤지션들과 자주 교류하나.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뮤지션들이 많고,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어떻게 보면 힙합씬에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중에선 넉살이나 뱃사공과 자주 만나는 편이었는데, 다들 바빠져서 예전처럼은 못 본다. 요새는 회사 소속 뮤지션들과 자주 보고 소통한다.

넉살, 뱃사공과 ‘장미’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어떻게 모임을 만들게 됐고, 또 이름 지었나.
음악하는 사람들끼리 술을 좋아하고 또 많이 마실 것 같은데 소주 좋아하는 뮤지션들은 그리 많지 않다. 보통 클럽에서 양주 마시는 걸 더 좋아한다. 소주 술자리가 있으면 놀다가 끝까지 한잔 더하자면서 남는 게 나와 넉살, 뱃사공 셋이었다. “이렇게 먹을 거면 모임의 이름이나 붙여서 먹자” 하다가 ‘장미’란 이름이 나왔다. 되게 촌스러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딱 맞았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허름한 술집의 간판에서 따온 그 이름이 맞다.

많은 이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자신의 길을 걸어온 랩퍼들이 인정받는 시대가 왔다. 그 중 한 명으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진지한 질문인데 진지하게 대답하기 힘들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라. ‘꼭 해낼 거야.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결국엔 보여줄 거야’라는 마음으로 버텨낸 것은 아니다. 그런 마음가짐이었으면 뜨겁게 타오른 만큼 실망도 커서 버티지 못했을 거다.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가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지금을 제외하곤 음악에 온전히 집중해 본 적이 없었다. 씬에 있는 사람들은 “차붐은 공백기가 있었다. 앨범을 자주 내지 않고, 무대에도 잘 서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런 포지션이면 잊혀지기 마련인데 신기하게도 난 잊혀지진 않았다. 앨범 나올 때 마다 많은 분들이 기대해주셨고, 갈수록 더 잘됐다. 지금도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크레딧은 내 음악을 지지해주시는 분들께 돌려야 한다. 그 분들 덕분에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

안산에서 나고 자랐고, 안산을 아이덴티티로 삼으며 결과물을 만들어왔다. ‘랩퍼를 꿈꾸던 소년’ 차붐의 자양분이 됐던 안산과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뮤지션’ 차붐이 느끼는 안산은 지금도 똑같은가? 안산은 지금의 당신에게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인가.
어릴 때는 애증이 더 강해서 안산을 떠나야 할 장소라고 여겼는데, 지금은 애정이 더 강하다. 안산은 고향이자 집이다. 사람들이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잘 몰랐던 안산이란 곳을 알리게 됐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안산을 대표하는 분은 내가 아니라 시장님이신데 “안산을 대표하는 사람이 됐는데 기분이 어떠세요”라는 질문을 간혹 받는다. 홍보대사라도 시켜주시면 감사히 하겠다.(웃음) 예전엔 ‘동네를 떠나야 성공할 수 있다’라는 하나의 메타포가 내 한 구석에 자리했다면, 지금은 이를 넘어선 그 다음 단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다음 단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나.
다음 단계는 물질적인 부분의 성취가 될 수도 있고, 개인의 성장이 될 수도 있다. 알바하면서 쪼들리게 살았을 때는 돈의 가치에 대해 잘 몰랐는데 중국에서 사업하는 동안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게 많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내가 나를 위해 내 돈을 쓴다’라고 생각했다면 이후에는 ‘돈으로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레이블을 운영하며 기획하고 제작한다거나, 부모님께 용돈도 드릴 수 있지 않나. 그러니 돈의 가치가 달라지더라.
개인적으론 선한 미소를 지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고생만 하고 인상 쓰면 얼굴이 악하게 늙는데, 그게 싫다. 50~60대가 됐을 때 누구나 편하게 다가와 말 걸 수 있는 좋은 사람, 배우 안성기 씨처럼 나이 들고 싶다. 맥심 커피 광고를 찍을 수 있는 중년. 음악적인 성취도 중요하다. 20대 후반, 음악을 그만둘 생각을 했었다. 빅딜 이후엔 크루 등의 집단에 속하지 않은 채 독고다이로 버텨왔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그 시간들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 그 다음 단계를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니까. 그 시간들을 거쳐 내게도 가족(레이블)이 생겼다. 지금은 레이블을 안정화시키고, 문화예술의 범주 안에서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목표가 있다. 음악을 시작했을 때의 기분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런 설렘이었던 것 같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본다. 다음 챕터가 기다려진다.(끝)

레이백 레코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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