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막바지 꼭 지켜야 할 6가지 삶의 태도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누구나 늙음은 처음 가는 길이다. 무엇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지만 늙어 가는 이 길은 몸과 마음도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하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볼 때도 많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다.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다.
요즘 내가 먹는 것이 시원치 않다. 끼니마다 먹는 밥이 겨우 반 공기 정도다. 거기에다가 매운 것만 입에 들어가면 온통 기침이 튀어나와 견딜 수가 없다. 매워도 못 먹고, 시어도 못 먹고, 짜도, 달아도 먹을 수 없으니 집사람 보기가 여간 민망한 것이 아니다. 또 그 투정을 견뎌주는 아내에게 미안하기가 그지없다.
늙어서 그럴까 아니면 이제 몸의 한계가 와서일까? 거기에다가 언제나 배가 더부룩하다. 무슨 고장이 난 것은 아닐까? 오래 전에 필자 어머니가 대장암으로 돌아가셨다. 대장암은 유전이라는데 아마 나도 이미 때가 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노년(老年)은 새로 전개(展開)되는 제3의 삶이라고 한다. 그 동안 나이와 화해(和解)를 배우며, 불편(不便)과 소외(疏外)에 적응하고, 감사생활과 사랑에 익숙해지는 수행에 열심이었다. 그 덕분에 그런대로 인생을 잘 살아왔다고 자부해 왔다. 이렇게 노년이라는 제3의 삶을 아름답게 살기위해서 힘과 여유(餘裕)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세상을 맑고 밝고 훈훈한 덕화만발의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한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이와 같이 노년에게 주어진 제3의 삶을 사랑과 감사로 막을 내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노년은 새로운 삶의 시작일 수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노년은 황혼(黃昏)처럼 사무치고 곱고 야무지고 아름답다. 누가 노년을 추하다고 할까? 서녘하늘에 불타오르는 낙조(落照)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저녁하늘도 마땅히 아름다워야 하지 않는가? 황혼은 아름답다. 위대한 교향곡(交響曲)의 마지막 악장(樂章)처럼 장려(壯麗)하게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한 혼신(渾身)의 노력으로 몸과 마음 다 태우는 열정(熱情)으로 살다가 떠나가면 좋겠다.
노년은 누구에게나 모범이 되고 기쁨이 될 수 있는 나이다. 노인은 언제, 어디서나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獻身)할 수 있다. 노인은 그냥 무기력하게 스러지면 안 된다. 마지막 성취(成就)와 결실을 향한 장엄한 팡파르를 울릴 때인 것이다.
우리가 어쩌다 혼자가 된다 해도 고독(孤獨)과 싸우지 말고 고독과 어깨동무하고 즐기며 사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추(醜)하고 치사(恥事)하게 보이면 안 된다. 수행을 통해 내생을 준비하며, 돌부처처럼 묵묵하고 진중(鎭重)하게 살아야 한다. 자신을 갈고 닦으면 권위(權威)와 인품도 저절로 생기고 어느 누구에게서나 존경받는 원로(元老)가 되는 것이다.
몇년 전부터 지팡이가 없으면 걸을 수가 없다. 이제는 무명초(無明草)라고 하는 머리칼도 시원하게 밀어버렸다. 사시사철 한복 한벌에다가 흰 운동화 그리고 중절모자를 쓰고 다닌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老慾)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거리다가 찾은 것이 덕화만발이다.
내가 요즘 생각하는 나의 만년의 삶이다.
첫째, 건강에 안달하지 않는다. 넉넉하고 윤택하지 않아도 삶이 그윽하고 만족스러워 무엇을 먹어도 무엇을 입어도 어디에 살아도 즐겁게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고마워하며 살겠다.
둘째, 죽음의 보따리를 쌓는다. 언제 삶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을 흐트러지지 않게 정리한다.
셋째, 욕심을 내려놓는다. 욕심은 끝내 충족될 수 없다. 그것을 채우는 것보다 욕심을 줄이는 것이 현실적이다.
넷째, 자랑하지 않는다. 자기를 애써 돋보이려고 하는 것은 자기 확신이 없고 속이 텅 빈 사람의 짓이다. 늙음을 초조하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추하고 딱한 모습인가.
다섯째, 항상 중도를 잃지 않는다. 들리지 않던 것도 더 많이 들을 수 있는 것이 노인이다. 큰 소리가 반드시 옳은 소리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침묵 속에서 그 침묵의 소리를 듣고 중도를 잃지 않겠다.
여섯째,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길 바란다. 바위가 이야기하는 것도 들리고 꽃의 숨소리도 들리는 노인이 되어보겠다. 늙음의 소리도 들을 수 있고, 그래서 마침내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잔잔한 평화가 서서히 마음을 적셔오는 것을 온몸으로 들을 수 있는 그런 노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