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년] 성균관대 교정에 우뚝 서있는 심산 김창숙 선생께
[아시아엔=최진영 전북대 간호학과 졸업생] 심산 김창숙 선생님은 선비로서 대의명분론을 평생 실천하며 나라에 헌신하셨습니다. 나라를 위해 하신 일들은 국운을 일으키고 민족혼을 불어넣으며 대한민국 역사를 만들었지요. 독립항쟁은 실력양성, 독립청원, 무력투쟁 등으로 이뤄졌습니다. 다양한 항쟁은 독립을 성취하겠다는 열의가 솟구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1905년 을사5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리며 독립을 일구기 시작하셨습니다. 1909년엔 한일병합을 제창한 일진회를 규탄하라는 건의서를 중추원과 신문사에 보내셨지요. 일진회 성토 때문에 2번째로 체포되었고 헌병대와 경찰서에 10여 차례 연행되셨습니다. 8개월 동안 옥중생활 하셨으며 석방 뒤엔 헌병과 형사의 감시를 받으셨습니다. 건의서를 취소하라는 헌병대와 경찰서의 협박도 우국충정을 꺾지 못했지요.
1910년에는 성명학교를 설립해 신식교육을 실시하며 인재를 양성하셨습니다. 성명학교 설립에는 단연회 활동으로 모은 국채보상자금이 사용되었지요. 국채를 갚기엔 자금이 부족했습니다. 그 돈을 정부에 전달하더라도 매국노들에게 들어갈 것이라 판단하셨지요. 매국노들의 동향까지 신경 쓰셨을 정도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바다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근대국가 발전에 사용된 자금은 국권 수호 결의를 뜻했습니다.
1919년 유림들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한민족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리셨습니다. 처음엔 유림들의 서명을 올린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제출하려고 하셨지요. 파리를 가기 위해선 상하이를 거쳐야했기 때문에 상하이로 가셨습니다. 하지만 김규식 박사가 파리강화회의로 떠난 뒤여서 독립청원서를 우편으로 보내셨습니다. 중국정부, 각국 공사관, 교포들에게도 발송하셨지요.
유림들의 독립청원서 발표로 유림 500여명이 체포된 일은 ‘제1차 유림단사건’이 되었습니다. 유림들이 항쟁에 투신함으로써 독립항쟁은 참여계층이 확대되어 범민족적으로 발전했지요. 선생님은 독립청원서를 발송한 뒤 중국에 남아 투쟁을 계속하셨습니다.
1920년대 들어 항쟁이 사그라지자 선생님은 무장독립투쟁을 펼치셨습니다. 폭탄투척 의거를 일으켜 일제의 심장을 흔들고 투혼을 싹 틔우셨지요. 파괴 대상은 수탈의 상징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였습니다. 당초 만주에 독립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와 모금한 뒤 중국으로 가셨습니다. 8개월 동안 모금하셨지만 모인 돈은 목표 개간 자금에 못 미쳤지요. 기지 건설에서 청년결사대 지원으로 계획을 변경하고 모은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셨습니다.
1926년 의열단원인 나석주 의사에게 권총과 폭탄, 자금을 주며 폭파를 지시하셨습니다. 나석주 의사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과 일경을 사살하며 용맹을 떨쳤습니다. 선생님의 지원이 힘이 되어 나석주 의사가 더욱 사력을 다해 싸웠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석주 의사의 의거는 국내 동포들에게 일제와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1927년 좌우합작단체 신간회가 결성되고 1929년 학생독립투쟁이 일어나 전선이 이어졌지요.
일제는 선생님이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선생님을 도운 유림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해 600여명의 유림을 체포했지요. 이것이 제2차 유림단 사건이었습니다. 병원에 입원 중이던 1927년 5월, 선생님도 일본 형사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대구경찰서에 도착한 뒤 고문을 받으셨지만 애국심은 더 일어섰습니다.
옥중에서 투쟁을 이어가셨던 것이지요. 1928년 10월 변호사 없는 재판을 통해 식민통치는 불법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 변호사가 무료 변론을 자청했지만 본인은 죄수가 아닌 포로라며 변호를 거절하셨지요. 포로가 적의 법률을 따르는 변호사를 선임하는 건 모순이라는 까닭도 덧붙이셨습니다. 불리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조국이 독립국임을 밝히셨던 행동은 전율을 일으켰습니다. 불멸의 국혼을 온몸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지요. 1928년 12월 징역 14년형을 선고받으셨습니다. 항소하라는 지인들의 말도 안 들으셨다는 사실에서 하늘을 달군 절개를 다시 느꼈습니다. 일본인 고등계 과장과 일본인 판사가 감탄했을 정도로 선생님의 절개는 티 한 점 없었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어도 일제에 순응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수감자들이 으레 하던 소장에게의 목례를 하지 않으며 애국자의 기개를 떨치셨지요. 소장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독립항쟁 정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자세 하나하나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며 나라의 생명을 피우셨기에 울컥했습니다. 일제가 회유와 협박으로 절할 것을 여러 번 강요할수록 불복종을 거듭하셨습니다. 말을 잘 들으면 가출옥할 수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도 선생님은 절개로 응하셨지요. 창씨개명도 거절하며 그 무엇도 충심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일제에 다시 각인시키셨습니다.
1934년 가석방된 뒤 일제의 감시 속에서 살면서도 대일항쟁을 모색하셨습니다. 여운형 선생님의 건국동맹 참여 부탁을 수락해 1944년 건국동맹 남쪽지역 책임자가 되셨지요. 나라 건설을 미리 준비해 조국이 해방되었을 때 자주적인 나라로 서도록 하고자 하셨습니다. 1945년 8월 7일 건국동맹 참여가 발각되어 수감되었지만 10여일 뒤 석방되었습니다. 조국이 해방되었기 때문이지요.
인동초 같은 충심이 독립을 맺은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충을 저버린 선비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유림연합회 등 부일유림단체나 일제가 성균관을 격하한 경학원에서 활동했지요. 선생님은 그들과 달리 국권이 피탈되자 충절을 한층 다지며 독립을 일궈나가셨습니다. 참선비의 모습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던 조국에 빛이 되었습니다. 조국은 36년 동안 터널을 지난 끝에 양지에 다다랐고 1948년 정식정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선생님의 독립항쟁은 해방 뒤에도 이어졌습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애족정신 계승을 주도하며 민족정신을 고양시키셨지요. 정신도 바로서야 독립이 완성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그해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하며 유교를 되살리셨습니다. 1946년 5월에는 유도회 총본부를 조직한 뒤 위원장에 취임해 부일유림들을 몰아내셨지요. 9월엔 성균관을 계승한 성균관대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하셨습니다. 후세들이 유교의 충의 사상을 이으며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서도록 가르치신 것이었지요.
선생님은 1960년 5월 허정 과도내각에 부일배들을 축출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허정 과도내각이 들어선 해는 반민특위가 와해된 지 11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부일배 처벌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을 시기에 민족혼의 불씨를 살리신 것입니다.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겠다는 의지가 한반도에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민족반역자 처단 의지가 후대에 전해져 현재도 부일배 청산이 이뤄지는 것이라 믿습니다. 부일배 기념물 철거와 부일배 서적 발간 등 여러 가지로 부일배 청산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끝없는 지조가 구국활동으로 발화하고 민족정기의 싹으로까지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애국으로 일관하며 국맥을 이으신 선생님은 독립의 지주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문화관광해설사가 되고자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화관광해설사가 되어 독립항쟁 유적지를 안내할 때 선생님을 같이 소개할 것입니다. 관광객들이 선생님을 배우며 나라의 소중함을 깨닫고 애국심을 기르도록 이끌 것입니다.
대한민국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선생님의 애국심은 대한민국의 횃불로 승화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충절을 받들어 역사가 올곧게 흐르도록 함으로써 횃불에 생명을 더하겠습니다.
*필자 최진영
전북대학교 간호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