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미식·지성·인생 가르쳐준 스승 ‘피터현’···34살 차이 뛰어넘은 ‘우정’

피터현은 평생 와인으로 우정을 나눴다. 빈소 한 탁자위에 놓인 그의 부고 기사와 책 그리고 와인 두병

아래 글은 지난 23일 별세한 재미 언론인이자 작가인 피터현을 그리며 조성관 전 주간조선 편집장이 24일 밤 조문을 마치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글입니다. 조선일보 퇴사 후 천재연구가·문화기행작가 등으로 집필과 강의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조씨는 “피터현 선생을 만난 것인 평생 큰 행운”이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해 마시지 못하는 와인도 한잔 마셨다”고 했습니다. 그의 추모글 전문 그대로 옮깁니다. <편집자>

[아시아엔=글·사진 조성관 천재연구가, 문화기행작가, 전 <주간조선> 편집장] 방금 전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생전의 피터현

오늘 아침 신문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 일면부터 제목을 읽어나갔지요. 그런데 사람들면에 부음기사를 보고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오랜 지인의 부음이 실려서였습니다. 재미작가 피터현(현웅 1927~2019).

도서관에서 오늘 예정한 분량의 글을 쓰고 빈소를 찾았습니다. 고인의 영정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영정사진 아래에는 고인이 생전에 좋아한 와인 두병이 놓여있었습니다.

벌써 25년 전입니다. 제가 월간조선 주니어기자이던 어느날 당시 조갑제 편집장이 불렀습니다. 재미작가 피터현이 회고록을 연재하기로 했는데 맡아서 책임지고 처리해달라.

이렇게 피터현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피터현은 우리말로 원고를 쓰지 못했습니다. 워낙 일찍 한국을 떠나 영어로 쓰는 게 자연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피터현의 영어 원고를 김준길씨(주미공사 역임)가 번역해 저한테 보내왔습니다. 저는 그 원고를 조금 손보고 제목과 중간제목을 달아 데스크에 넘기는 일을 했습니다. “바람처럼 세계를 떠도는 사나이 피터현 회고록”라는 제목으로 첫회 연재분이 나갔습니다.

피터현 추모 기사

첫회부터 피터현 회고록은 월간조선의 인기연재물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원고를 손꼽아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이야기가 전개될까, 정말 궁금했습니다.

피터현은 1940년대말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 저널리스트로 세계를 방랑하며 영어로 글을 썼습니다. 피터현의 회고록은 시간적으론 1950년대~1970년대, 공간적으론 뉴욕, 파리, 로마, 런던 등을 망라했습니다. 그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회고록의 주류를 이뤘습니다. 흥미진진했습니다. 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불어가 되니 피터현은 그 당시 한국인은 상상도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 교유를 가졌습니다. 저는 그의 원고를 처리하면서 한번 뿐인 짧은 인생에서 피터현처럼 사는 인생도 있구나, 감탄했습니다.

저는 주니어기자로서 피터현의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피터현이 귀국할 때마다 만났습니다. 나는 피터현으로부터 미식을 배웠고 지성을 배웠고, 그리고 인생을 배웠습니다.

필자와 편집자의 관계로 시작되었지만 우리는 나이차를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가 전화를 걸어오면 만사를 제쳐놓고 나갔습니다.

내가 그를 오래도록 좋아한 데는 그의 인간성이 한몫 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권위주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위선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34년의 차이가 났지만 거의 모든 주제로 대화를 나눠습니다. 무엇보다 미식의 에로티시즘에 눈을 떴습니다. 국내 프랑스요리의 대가인 박효남을 알게 된 것도 그 덕분입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게 4년전 쯤입니다. 서촌에서 피터현, 현영인 부부와 박효남 부인을 만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습니다.

빈소에서는 소주 대신 와인이 나왔습니다. 술을 못하는 나였지만 피터현을 생각하며 두잔이나 마셨습니다. 부인으로부터 고인이 3년여 치매로 고생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불콰하게 취기가 돌자 피터현과 함께했던 시간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고인은 프랑스에 작은 샤또를 갖고 여름마다 그곳에서 보내곤 했습니다. 저한테 놀러오라고 그렇게 많이 얘기했는데, 결국 그곳에 가지 못했습니다.

런던 출신 영국인 사위(Adam)와 런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저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천재의 흔적을 따라 세계를 방랑해온 것이 사실은 피터현의 노마드적 삶에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탐미적 인생관과 코스모폴리탄적 삶을 동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걸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피터현 선생님, 고맙습니다. 제 인생에서 선생님을 만난 건 행운이었습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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