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2일] ‘세계 물의 날’ 불 끄기 나선 쿠웨이트
2008년 대만 총통선거에서 마잉주 후보 당선
마잉주(馬英九) 국민당 후보가 2008년 3월22일 치러진 타이완 총통 선거에서 셰창팅 민주당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됐다. 8년 만에 맞은 정권 재탈환 순간이었다.
마잉주는 선거승리 직후 기자들에게 “중국과 정치적 쟁의를 일단 접어두고,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면서 전면적인 경제협력 협정을 맺겠다”고 말했다. 그는 앞서 대만과 중국을 공동시장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공약을 누차 밝힌 바 있다.
그는 당선 이후 집권 과정에서 양안간 직항로 개설, 중국인 대만관광 허용 등을 통해 대만과 중국의 경제적 긴밀도를 강화했다. 따라서 지구촌 거대 자본들이 대만으로 몰려들었다. 이번 선거로 대만과 중국의 관계가 크게 향상되며, 궁극적으로 대만과 중국 경제의 통합을 점치는 전문가들도 여럿 있었다.
2012년 1월14일 실시된 타이완 총통선거에서도 마잉주 총통이 차이잉원(蔡英文, 45.6% 득표)을 제치고 재임이선승했다. 그러나 득표율은 2008년 765만8224표(58.4%)보다 다소 떨어진 689만1139표(51.6%) 수준이었다.
중국 본토에서는 마잉주 총통의 재선을 환영했다. 중국공산당 타이완공작판공실 겸 국무원타이완판공실 대변인은 15일 “양안 관계의 평화적 발전이 정확한 노선일 뿐만 아니라 타이완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 지난 4년간을 통해 증명됐다”며 “중국은 ‘92공식’의 기초 위에 양안관계와 평화를 더욱 발전시키는 새 국면을 열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 노력하자”고 제안했다. ‘92공식’은 1992년 중국과 대만이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해석은 중국과 대만 각자에 맡기고 각자의 명칭을 사용하기로 합의한 것을 말한다.
1993년 UN이 정한 제 1회 ‘세계 물의 날’
1993년 3월22일은 ‘제1회 세계 물의 날(World Water Day)’이었다. 4개월 전인 1992년 11월 당시 제47차 UN 총회에서 매년 3월 22일을 ‘세계 물의 날’로 제정·선포하고 점차 심각해지는 물 부족과 수질 오염을 방지하자고 결의한데 따라 맞은 첫 ‘물’ 기념일이었다.
물 관련 각종 회의와 전시회, 홍보물 제작 등 여러 가지 수자원 관련 행사에 세계 각국이 지혜를 모았왔다. 세계 물포럼(World Water Forum)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UN은 1965년부터 국제 수문 10개년 사업을 벌여 세계 수자원의 관리를 위한 종합적인 해결방안을 조사해 왔다. 1967년 세계 물 평화회의, 1972년 UN 민간 환경회의에 이어 1977년 UN 수자원 회의 때는 국제 음용수 공급 및 위생설비 10개년 계획을 시행에 옮기기로 결정했다.
1992년 6월에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UN환경개발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UNCED)’를 개최, 지구의 환경질서 보전을 위한 <리우선언>과 그 실천 계획인 <Agenda 21>을 채택해 21세기를 향한 지구환경보전 종합계획을 제시했다.
UN 주도의 ‘세계 물의 해’가 마감됐던 2003년 12월23일 당시 제58차 유엔총회에서 2005~2015년을 ‘생명을 위한 물’ 행동 10개년(International Decade for Action, ‘Water for Life’, 2005~2015)으로 선포했다. ‘생명을 위한 물’ 행동 10개년은 ‘제13회 세계 물의 날(World Water Day)’인 2005년 3월22일 정식으로 시작됐다.
물과 관련된 지구촌의 의제는 이밖에도 ‘의제21(Agenda 21)’, ‘유엔새천년선언(UN Millenium Declaration)’ 등 다수 이니셔티브와 프로젝트에 포함돼 있다.
한국수자원학회에 따르면, 한국의 ‘물의 날’은 당초 7월1일이었다. 한국수자원공사가 1990년부터 물 수요가 가장 많고, 물 관련 재해가 발생하기 쉬운 시기인 7월1일을 ‘물의 날’로 제정, 다양한 물 관련 행사를 개최한 것이 계기였다. 그러나 ‘세계 물의 날’을 주관하고 있는 UN개발계획본부에서 한국도 국제일정에 동참해 주도록 요청, 1995년부터 3월22일로 ‘물의 날’을 변경했다.
세계에서 수자원이 가장 풍부한 나라는 그린란드로 알려져 있다. 히말라야 빙하 수가 풍부한 네팔, 눈과 빙하로 덮인 알래스카가 그 다음 수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꼽힌다.
한국의 경우 희한하게도 정권이 바뀌면서 물 부족 국가 지위도 바뀌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매체인 한겨레신문은 노무현 정부 집권 당시인 지난 2007년 3월21일 오후 6시30분4초에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 당시 정남기 논설위원의 칼럼에서 “(국민 1인당 이용 가능한 수자원은 한국이) 1491t으로 세계 최하위권(146위)”이라며 “물도 적지만 실제 이용 가능한 수자원이 많지 않고, 가용 수자원이 2025년까지 40% 감소할 것이란 전망”이라고 썼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권 이후 한겨레는 “한국이 물 부족 국가라는 정부의 주장에 대해서도 많은 국내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2010년7월12일자 한일 전문가들 “4대강 보, 장기간 활용 못해” 보도 참고)하는 한편 “한국이 심각한 물 부족 국가라는 정부 발표는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을 펴는 환경운동가와 교수 등 환경전문가들의 주장을 칼럼과 기고, 보도를 통해 한국이 물 부족 국가가 아니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2004년 ‘하마스’ 창설자 야신 피살
2004년 3월22일 팔레스타인 최대 무장 저항운동 단체 하마스의 창설자인 셰이크 아흐마드 야신이 사망했다. 하반신 불수인 야신은 1987년 하마스를 창설했으며 이스라엘 감옥에서 수년간 복역한 뒤 1994년 석방됐다. 그는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면서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을 정신적으로 지도해 왔다.
야신은 가자지구 사브라지역 이슬람 사원에서 예배를 마치고 경호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떠나오던 중 이스라엘 아파치 헬리콥터에서 발사된 미사일에 피격돼 현장에서 숨졌다. 이스라엘군 헬기는 세 발의 로켓을 발사했으며, 야신을 부축하던 경호원 2명과 인근을 지나던 행인 등 5명이 숨지고 12명이 부상했다.
야신은 죽기 약 일주일 전인 3월14일 이스라엘 항구도시 아쉬도드에서 발생한 팔레스타인 10대 2명의 자폭공격으로 이스라엘인 10명이 숨진 뒤 자폭공격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런 사건 등을 3년 넘게 겪어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충돌 과정에서, 이스라엘 샤론 총리가 야신의 살해를 직접 지시한 것은 큰 뉴스거리가 아니었다. 지이브 보임 이스라엘 국방부 부장관은 사건 직후 기자들에게 “하마스가 자행한 모든 테러공격에 셰이크 야신이 연루돼 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단 한명의 테러 지도자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지도자들에 대한 표적공격이 계속될 것임을 경고했다.
야신의 사망 사실이 발표된 뒤 수만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몰려나와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를 외쳤다. 하마스 지도부는 “샤론이 지옥의 문을 열었다. 그의 목을 치겠다”며 “시온주의자들의 존재를 파괴하기 위해 도처에서 지진과 같은 보복공격을 즉각 단행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1991년 쿠웨이트 유전 불끄기
1991년 3월22일 중동 쿠웨이트에서는 유전에 붙은 불끄기 대작전이 벌어졌다. 걸프전이 끝난 지 20일만에 전후복구 차원에서 진행된 작업이었다.
미국과 캐나다의 소방 전문가들이 쿠웨이트의 유전 진화에 동원됐다. 전문가들은 방화복으로 중무장하고 불타는 유전의 담장에 쇠줄을 걸어 무너뜨렸다. 담장이 무너지면 진흙 같은 화공약품을 유정 파이프 위로 분사해 불길에 산소가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는 식이었다.
이라크는 걸프전에서 항복하기 전 쿠웨이트 유전의 80% 이상에 불을 질렀다. 전쟁을 하는 자들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랴.
1945년 카이로에서 이집트 등 7개국 아랍연맹 결성
1945년 3월22일 중동평화와 안전을 확보하고 아랍제국의 주권과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아랍연맹이 결성됐다. 초기 가맹국은 시리아와 요르단,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이집트, 예멘 등 7개국이었다. 2008년 현재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가입되어 있다. 그러나 창설멤버인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 체결(1979년 3월26일)을 이유로 자격정치처분을 받았으나 위키피디아 자료에는 여전히 포함돼 있다. 이를 계기로 아랍연맹 본부를 카이로에서 튀니지로 옮겼다가 다시 번복하기도 했다.
아랍연맹 소속 국가들 중에서 이집트와 요르단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2012년 현재 시리아는 시리아 봉기 때문에 자격 정지된 상태다.
아랍연맹은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며 유태국가를 팔레스티나에 건설하려하자 전쟁돌입을 결의했다. 1990년 8월 카이로에서 열린 긴급정상회의에서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비난하고 쿠웨이트에서의 이라크군 즉각 철수 및 사우디아라비아에 아랍연합군 파견을 결의한 바 있다.
아랍연맹은 1950년 4월13일 집단 방위와 경제협력에 대한 협정서가 조인되면서 군사적 방어조치에 대한 조정권도 갖게 됐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관한 문제로 내분이 생기면서 기능이 약화됐다. <글=이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