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나그네’ 김남조 “삭풍의 추위를 벗고 옆에 앉으니”

나그네, 잠시 쉬다

내가 성냥 그어
낙엽 더미에 불붙였더니
꿈속의 모닥불 같았다
나그네 한 사람이
먼 곳에서 다가와
입고 온 추위를 옷 벗고 앉으니
두 배로 밝고 따뜻했다

할 말 없고
손잡을 일도 없고
아까운 불길
눈 녹듯 사윈다 해도
도리 없는 일이었다

내가 불 피웠고
나그네 한 사람이 와서
삭풍의 추위를 벗고
옆에 앉으니
내 마음 충만하고
영광스럽기까지 하다
이대로 한평생인들
좋을 일이었다

 

# 감상노트

모닥불 피워 나그네 언 마음도 녹이게 했으니 누가 기쁜가. 발그레 얼굴 따뜻해진 우리는 너나 없는 나그네. 누구 할 것 없이 먼저 나누어 곁을 준다면 두 배로 밝고 따뜻하리. 더하여, 성냥 그어 불 피웠다는 생각까지도 눈 녹듯 사윈다면 고개 드는 온갖 번뇌까지도 녹아 없어지리. 나는 언제 알게 될 것인가. ‘나’라는 생각조차 없는 희유한 기쁨을. (홍성란 시인 · 유심시조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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