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문화 박노해 시인 “지식·재미 축적보다 ‘내적 식별력’ 채워 나누길”

2018 나눔문화 후원의밤, 그들은 희망을 더 펼쳤다

[아시아엔=편집국] 나눔문화 18주년 후원모임이 11월 22일 340여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우정을 나눴다.?이날 박노해 시인은 한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살아갈 힘을 회원들과 함께 길어올렸다. 다음은 박 시인의 이야기 전문이다. <편집자>

보고 싶었습니다. 올 한해도 심란하고 힘든 일이 많으셨죠? 그 모든 일을 다 감당해내고 이렇게 빛나는 마음을 지키며 여기 다시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진정한 ‘위너’입니다. 우리 잘 살아냈다고, 장하고 고맙다고, 나 자신과 서로에게 따뜻한 박수 한번 보내면 좋겠습니다. (박수)

인연의 신비, 기적의 사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말이 있죠. 저는 가면 갈수록 이 말이 무섭게 다가옵니다. 저에게 인연이라는 말은 온 우주에 걸려있는 ‘생의 전율’입니다. 이 가없는 광활한 우주에서, 저 끄트머리 태양계 지구별 위에, 같은 시대 사람으로 태어나 우리가 이렇게 조우했고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생의 신비이고 기적의 사건입니다.

모든 일은 인연 따라 이루어집니다. 인연이란 그냥 만남이 아닌 속 깊은 만남입니다. 온 존재를 내건 만남이고, 너에게로의 투신이고, 나의 존재 기반의 뒤흔듦이고, 아뜩한 도전입니다. 그 불꽃의 만남이 나를 더 높은 차원으로 데려갑니다. 나를 만나서 그대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더 자유로운 영혼이 되기를. 더 고유하고 고귀한 존재가 되어 선물 받은 이 짧은 생을 다 불사르고 남김없이 피고 지기를. 그것이 사랑이고 우정이고 생의 도반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무슨 인연일까요. <나눔문화>라는 별나고도 별난 모임, 다 알 수도 없고 계산도 되지 않는 모임에 어떻게 내 인생이 엮이게 된 걸까요. 그리하여 <나눔문화>와 함께한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갖고 어떤 위상을 띄게 되는 걸까요. 지금은 아무도 모릅니다. 저도 차마 다 알지 못합니다. 다만 ‘느낌적인 느낌’, (웃음) 예감이 있을 뿐입니다.

<나눔문화>는 하찮고 미미하고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는 작은 모임입니다. 그대도 나도 이 사회 속에서는 작고 작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기꺼이 작은 그대와 나는 실상은 고귀하고 위대한 존재이고, 온 우주 가운데 비할 데 없는 단 하나의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합니다. 인생 뭐 별거 있냐고,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우리는 지구 중력에 닫힌 ‘세계관’과 물질 권력에 사로잡힌 ‘가치관’에 딸려가는 다수의 ‘인생관’을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네! 인생 별일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별 일’, 별의 일, 우주적 생의 일, 하늘의 일이고 별 볼 일 있습니다. 별일이 있는 자중자애自重自愛할 인생입니다. ‘별의 일’로 이어진 우리 인연에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박수)

나눔문화 후원의밤의 박노해 시인

우리는 혁명의 승리자입니다

촛불혁명 2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집중해야 할 ‘촛불혁명의 5대 과제’를 책에 적시했습니다. 적폐 청산. 경제 민주. 남북 협력. 젊은 농촌. 생명 안전.

이 중에 가장 어려워 보였던 것이 ‘남북 협력’인데 그것이 풀리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개혁과 삶을 잡아먹고, 모든 것이 한 번에 엎어지는 게 전쟁입니다. 분단 70년 비극의 역사를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고, 우리 겨레의 평화와 번영의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득권의 근거지였던 분단 적대 체제를 연장하기 위해 결사 항전하는 세력들이 뭉치고 있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이기에, 이것만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군부와 기무사 적폐 청산, 양승태 대법원과 사법부 청산, 방송과 신문보다 강력해진 네이버와 여론공작팀 청산, 보수 진보를 넘나들며 재벌의 손발이 된 관피아 청산, 그리고 이 모든 적폐 세력의 배후이자 돈줄인 삼성 일가의 부정비리 청산과 재벌 개혁.

지지부진한 적폐 청산과 개혁 작업에 답답하시죠? 수구 세력은 정권만 잡으면 우리가 10년 동안 힘겹게 진전시킨 개혁 성과를 단 1년 만에 거침없이 뒤엎어놓는데, 민주 진영은 법 지키고, 여론 살피고, 규정 따르고, 의회에서 막히고…. 그러나 조급하면 탈이 나고 성급하면 병이 납니다.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혁명은 무서운 것입니다. 한번 혁명이 일어나면 30년입니다. 지그재그로 가더라도 결코 뒤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혁명의 승리자입니다. 승리자가 패자처럼 굴면 안 됩니다. (박수) 변하지 않은 현장과 어려워진 살림이어도 일희일비하지 말고 담대하게, 긴 호흡 강한 걸음으로 나아갑시다.

지식의 축적이 아닌 내적 식별력을

매일매일 속 터지고 선정적인 뉴스들 속에서 귀와 눈을 좀 씻고, 맑은 눈으로 세상과 삶 전체를 바라보는 깊고 높은 차원의 ‘식별력’을 길러가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죠. “인간은 제대로 된 역사를 쓰지 못한다. 과거에는 자료가 너무 적어서 쓰지 못하고 현재는 자료가 너무 많아서 쓸 수가 없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손에 든 이후, 뉴스와 정보와 재미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지금 시대에 정말로 중요한 인간 능력 중 하나가 ‘식별력’입니다. 지식과 정보의 축적이 아닌 내적 식별력이 있어야 사태의 전모가 보이고 가치의 중심이 잡히고 악의 급소를 명중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의 ‘근본 기분’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 사람들을 사로잡는 ‘근본 기분’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 나이 든 세대의 근본 감정은 배신감과 울분, 허망함입니다. 일제와 전쟁과 빈곤과 독재와 IMF까지를 다 겪으며 인생을 바쳐 죽도록 일하고 자수성가하고 이 나라와 가정과 자식을 이만큼 키웠는데, 돌아오는 것은 배신감입니다.

수명은 길어지고 은퇴는 해서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자식들과는 대화도 되지 않고 젊은이들은 꼰대 취급하고 나의 성취와 살아온 생이 부정당하는 허망함. 그러니 카톡과 유튜브의 가짜 뉴스와 그런 모임들이 이들의 근본 감정을 관통해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청년 세대의 근본 감정은 불안과 열폭, 냉소와 무기력입니다. 그래서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고 “의미없이 살겠다”는 말을 유행처럼 합니다. 젊음은 그 자체로 희망인데, 희망이 고문이 된 세대. 쿨한 척, 괜찮은 척, 잘난 척하다가도 그런 내 노력이 다 무의미해지는 순간 무너지고, 토닥토닥 자기 격려나 자기 위로로 시들어가는 젊음.

인간은 누구나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 잠만 자고 일어나면 저절로 하루를 살아갈 생명력이 차오릅니다. 사람은 살아있다면 뭐라도 해야 하고 가진 힘은 써버려야만 하는 숙명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체제 안에서는 욕망을 펼칠 데가 없고 넘치는 생명력을 쏟을 데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 파괴, 자기 학대를 시작합니다.

인간이 인간 그 자신을 파괴하는 시대의 징표, 자기보다 약한 자, 소수자를 경멸하고 배척함으로 자기 존재감과 소속감을 느끼는 터진 인성, 그것이 지금 유행처럼 번지는 ‘혐오’라는 질병입니다. 시대 모순의 급소를 찾지 못하고 ‘근본 비밀’과 ‘근본 적’을 찾지 못한 채, 일상에서 부딪치는 서로를 혐오하고 적대하는 ‘민중의 내전’이 치러지고 있습니다. 언제나 독점 지배 세력은 우리를 다양한 차원과 전선으로 분리하여 지배합니다. ‘민중을 분리시켜라! 서로 적대시켜라! 그리하여 통치하고 지배하라!’

인간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존재

제가 감옥에서 자유의 몸이 된 지 20년을 맞았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세계의 분쟁 현장과 지구상에서 가장 멀고 깊고 높은 마을을 찾아다녔습니다. 돌아오면 산간마을 월세방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경작을 하다 늦은 오후면 홀로 산을 오르며 묵상에 잠기는 시간이었습니다.

나무를 심고 먹을 걸 채취하고 꽃을 가꾸다 보면 한 생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이미 완성된 존재라는 생각. 바위도 이끼도 계곡물도 참나무도 야생화도 무당벌레도 휘파람새도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고, 더 나아질 필요가 없구나. 지구상에서 오직 인간만이 불완전하고 미완성으로 던져진 존재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지상의 생명체 중에 인간만이, 오직 인간만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존재입니다. 하여, 사람만이 희망하는 존재고, 희망은 살아있는 우리 인간의 불치병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저주받은 축복’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인류 역사가 진보할 수 있어 축복이고 바로 그래서 인간은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르는 저주받은 존재인 것만 같습니다.

지구 생명체 중에 오직 인간만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존재입니다. 하여, 사람만이 희망하는 존재고, 희망은 살아있는 인간의 불치병입니다. 목적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더 나아지려 함은 더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목적은 사랑, 잣대는 사랑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더 나아진 내가 되어야만 합니다. 더 나아진 내가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행복일까요? 행복해야 한다고 붙잡는 순간 곧바로 행복한 순간이 아닌 모든 생의 시간이 불행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행복할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뿐입니다.

더 나아진 내가 된다는 것을 어떤 이들은 깨달음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구원받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몇 번에 걸쳐 ‘하마터면 깨달을 뻔’ 했습니다. (웃음) 그 순간, ‘안 돼!’ 하고 깨어났습니다. (웃음) 깨달음은 수단이고 자비행이 목적입니다. 목적은 사랑입니다. 잣대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더 나아지려 함은 더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고 나누지 않고는 더 나아진 내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힘써 번 돈과 지위와 지식과 명성도 사랑하는 데 쓰지 않는다면, 다 무엇이겠습니까. 주지 않는 사랑은 지고 가는 고통입니다.

좋은 벗들과 동행하는 길

돌아보면 저는 그 많은 폭력과 고문과 무기수의 감옥 독방과 실패와 좌절, 분쟁 현장과 비난과 고난을 무슨 힘으로 살아냈던가. 무엇으로 죽지 않고 미치지 않고 살아남아서 이 낯설고 난파선 같은 시대 속에서 긴 침묵 정진으로, 그러나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랑, 사랑 덕분입니다. 자기 인생을 다 바쳐준 사랑의 사람들 덕분이고 내 사랑하는 동지들 덕분이고 나 또한 나를 다 바쳐가는 사랑 덕분입니다.

사랑의 힘은, 그 사랑의 사람을 지켜줍니다. 사랑은 온 우주 생명에 숨겨져 있던 힘을 끌어당겨 줍니다. 사랑은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사랑의 불로 나아가는 사람에겐 사랑이 찾아옵니다. 인연의 신비입니다.

나이 들수록 흐트러지고 날이 갈수록 빨라져 가는 소란스런 세계 속에서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좋은 벗들과 ‘함께하는 혼자’로 동행하는 것입니다. <나눔문화>는 세상 한가운데서 그 인연의 빛을 비춰주고 이어주고 희망의 길로 초대하는 곳, 더 좋은 내가 되어 좋은 세상을 이루어가는 곳, 좋은 삶을 모두에게 나누어 가는 삶의 혁명, 사랑의 혁명을 꽃피워가는 곳입니다.

꽃피는 새봄, 경복궁 나눔문화에서

돌아보니 올해 제가 회갑입니다. 세상에! (박수) 저에게 회갑은 세 번째 스물입니다. (웃음) 그리고 네 번째 스무 살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저는 하루하루 더 나아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지난 18년 동안 <나눔문화>는 더 나아지고 있습니다. 내년에 경복궁 <나눔문화>로 가면 더 나아질 것이고, 월세를 벗어나 <나눔문화> 집을 짓고, 백두대간 햇살 좋은 터전에 좋은 삶의 실현지인 <참사람의 숲>을 세우고 나면, 우주 시대의 인류에게 희망의 길을 여는 빛나는 역사를 쓰게 될 거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박수) 오늘은 그래요. (웃음)

곧고 선한 마음 하나로 상처받더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나누어주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 겸손하게 묻고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 약한 자 힘주고 강한 자 바르게 하는 정의로운 싸움에 힘을 주는 사람. 우리 각자의 처지와 자리에서 더 나아진 내가 되어 다시 만납시다. 꽃피는 새봄에, 새롭게 이전한 경복궁 <나눔문화>에서 반갑게 만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사랑의 인연이기에, 다 잘 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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