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양안정책 갈등 ‘재점화’···가오슝시장 당선 한궈위 “‘하나의 중국’ 입장”
[아시아엔=김소현 기자] 국민당이 압승을 거둔 지난 11월 24일 대만 중간선거 주인공은 ‘민진당 철옹성’인 가오슝(高雄)에서 20년 만에 국민당 후보로 시장에 당선된 한궈위(韓國瑜·61)였다. 15만표차로 천치마이 민진당 후보(74만2239표)를 앞지른 그는 국민당 주석직과 차기 총통선거에서 유력 주자로까지 부상했다. 대만 언론은 ‘한류(韓流) 열풍이 불었다’고 했다. 한궈위의 이름 첫 두 글자가 한국을 뜻하는 한자(韓國)와 같아 그의 승리를 한류 열풍에 빗댄 것이다. ‘비(非)전통 정치인’이 ‘전통 정치인’을 몰아냈다는 평가도 많다. 한궈위는 해묵은 정치이념을 과감히 버리고 경제에 집중했다.
그는 소셜미디어(SNS)를 이용해 젊은층도 사로잡았다. 1957년 6월 대만 타이베이에서 태어난 한궈위는 군사학교 졸업 후 중국 쑤저우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대만국립정치대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중국문화대, 화롄사범대, 세계저널리즘아카데미, 차이나타임즈에서도 일했다. 대만 남서쪽에 위치한 윤린이라는 지방에서 의원으로 있는 리치아펑과 결혼해 세 자녀를 두고 있다. 대머리 정치인으로도 유명한 그의 ‘대머리’는 기발한 선거운동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유세 때 한궈위는 가오슝 인구수 227만명을 상징하는, 머리를 민 남성 227명을 연단에 세우는 장관(壯觀)을 연출했다. 반짝 빛나는 대머리를 활용해 “가오슝을 밝게 비추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그는 1993~2002년 입법의원(대만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후 국민당 정부 시절인 2012년 타이베이 농산물도매공사 사장으로 있었다. 그는 ‘인기 정치인’은 아니었다. 지난해 농산물도매공사 사장 자리에서 내려와 국민당 주석 경선에 출마했다가 4위로 낙선했다. 가오슝에서 요직을 차지한 적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궈위가 지난 5월 가오슝 시장 선거 국민당 후보로 지명됐다. 그와 맞붙은 천치마이(陳其邁) 민진당 후보는 12년간 가오슝 시장을 지낸 인물이다. 대만 제2 도시인 가오슝은 국민당 계엄 통치 시절 ‘민주화의 성지’로 1998년 이후 줄곧 민진당 후보만 당선됐다. 한국으로 치면 광주광역시인 셈이다. 국민당 내부에서도 그는 ‘버리는 카드’였다. 한궈위는 국민당에서 인력이나 자금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맨발로 선거 운동에 뛰어들었다.
“가오슝, 경제 살리자”란 구호로 유권자에게 다가간 그는 지난달 23일 마지막 유세에서 “가오슝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하자 당시 20만명이 넘는 지지자가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한궈위의 승리는 예견된 것이었다. 자신을 ‘채소 장수’ ‘비전통적인 정치인’으로 내세운 그는 편한 옷차림에 소탈한 언어로 가오슝 주민에게 다가갔다. 지난 8월 폭우 때 우산을 쓴 채 양복바지를 걷어 올리고 침수 현장을 돌아다니며 주민들과 대화했다. 이 모습이 언론에 나오자 유권자는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는 선거마다 되풀이됐던 ‘친중(親中)·반중(反中)’의 정치 논쟁은 피하는 대신 집권 민진당의 경제 실정을 맹렬하게 파고들고 선거 내내 ‘경제 살리기’에 집중했다. 민진당은 ‘대만 독립’을 내세우며 중국과의 교류를 소홀히 해 대만 관광객 감소 등을 가져왔고, 이는 경기침체 원인으로 이어졌다.
한궈위는 “민진당이 가오슝의 젊은이들을 (일자리를 얻기 위해) 타이베이로 떠나게 했다. 낡고 가난한 가오슝을 대만 최고 부자도시로 만들고 10년 안에 가오슝 인구를 500만명까지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신선한 선거운동도 한몫했다. 경쟁자인 천치마이 후보를 비난하는 ‘구식’ 네거티브 전략 대신 유튜브와 페이스북 등을 활용해 자신을 알렸다. 이 방식은 자연스레 민진당 지지 성향이 짙은 젊은 층에도 통했다.
한궈위는 당선 후 25일 양안(중국과 대만) 정책을 둘러싸고 중앙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그는 “‘92공식(九二共識·1992년 각자 국호를 쓰지만 ‘하나의 중국’은 인정하기로 한 합의)’이 바로 양안 관계에 대한 나의 입장이다. 앞으로 양안 간 실무 그룹을 만들어 교류를 강화해 가오슝이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중국과 싸우는 것보다 당장 배를 채우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