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알파벳-터키] 국부 케말 파샤 ‘글자혁명’의 빛과 그림자
우리가 하루 동안 읽는 글자는 모두 몇 자나 될까요? 우리가 하루에 사용하는 단어는 얼마나 될까요? 아무 것도 읽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며칠이나 견딜 수 있을까요? ‘나’와 ‘글자’에 대해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으신지요? 매거진N이 ‘알파벳’이란 보통명사로 통칭되는 ‘글자’의 이모저모를 살펴봅니다. 이집트·파키스탄·이탈리아 그리고 터키기자들은 무슨 얘기를 펼쳤을까요? <편집자>
[아시아엔=알파고 시나씨 기자] 10월 3일은 개천절,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의 민족의식이 제일 강해지는 때가 아닐까 싶다. <아시아엔> 자매 월간지 <매거진N> 제작진은 10월호 스페셜리포트 주제를 어떤 걸로 할까 많은 고민과 의논을 했다. 그렇게 해서 선정한 것이 표지에서도 보이듯이 ‘글자’다. 왜냐하면 ‘글자’ 혹은 ‘글자의 역사’는 하나의 민족의 기억장치로서 또는 그 민족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수단으로도 여겨진다.
‘알파벳’이 ‘글자’에 딱 들어맞는 보통명사로서의 영어단어이지만 제각각의 언어를 지칭할 때는 좀더 그 뜻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필자의 고국인 터키 사람들에게 ‘글자’는 아직 큰 혼란을 주는 개념이다. 이 말의 뜻을 이해하려면 필자와 함께 시간여행을 통해 2000년 전 중국의 북부지역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터키의 조상은 현재 터키가 위치하고 있는 아나톨리아반도에 살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 북부지역에 2000년 전에 존재했던 돌궐이다. 중국 자료를 보면 돌궐 사람들의 기원은 흉노족이다. 물론 돌궐과 흉노의 지배층이 같은 민족인지는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돌궐족의 지배층이 한때 흉노의 백성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두나라를 연결해준 것은 중국의 사료들만이 아니다. 글자를 통해서도 이들 국가는 서로 연결되고 있다.
1889년 몽골의 오르홍강 부근에서 오래 전 돌궐의 역사를 밝혀줄 중요한 비문이 발견된다. 그리고 9년 뒤인 1893년, 덴마크 학자들은 비문에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밝혀낸다. 돌궐에 관한 것이었다. 신기한 것은 오르홍 비문에 쓰인 글자와 한때 흉노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글자가 비슷했다는 점이다. 정리하자면, 터키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용한 글자는 ‘오르홍 글자’ 혹은 ‘돌궐 글자’였다.
투르크 역사가들은 “기원전부터 당나라가 돌궐을 멸망시킨 6세기까지 오르홍 글자가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투르크 계통 민족은 오르홍 비문을 큰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은 화폐에 오르홍 비문을 넣고 있다. 돌궐 문자를 자존심의 뿌리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한때 중국의 지배를 받은 투르크족은 새로운 두 문자와 만나게 된다. 첫째는 위구르 글자다. 위구르 글자는 아랍어 문자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란 동부에서 사용되던 수그드 문자를 돌궐식으로 재해석하면서 만들어졌다. 이 문자는 10세기까지 중앙아시아에서 널리 사용됐다. 몽골 문자도 어떤 면에서는 이 글자를 바탕으로 해서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아랍족이 세운 압바스왕조는 751년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와의 탈라스강 전쟁에서 맞섰다. 당시 투르크부족들은 “적의 적은 친구다”라는 원칙으로 아랍 편을 들었다. 아랍인들과 어깨동무 하며 전쟁을 치르면서 친근해진 돌궐의 후손, 즉 투르크부족은 아랍문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대부분 역사가 증명하듯이 문명의 교류는 일차적으로 종교와 문자에서 시작된다.
10세기 초기 탄생한 투르크국가들은 아랍글자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물론 말은 투르크 계통 언어였지만, 글자는 아랍글자를 쓴 것이다. 말하자면 세종대왕 이전에 한국사람들이 말은 한국어로 하면서도 한자를 글자로 하여 문장을 만들던 것과 같다.
터키인은 10세기 위구르글자 대신 아랍글자를 사용하면서 900년 넘게 아랍글자를 사용해 왔다. 아랍글자를 사용하면서 좋은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이슬람문명에 속해 있던 非아랍민족이 모두 아랍글자를 사용하고 있던 당시 투르크계 민족만 이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왕따를 당하고 심지어 침략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별개로 피지배층의 충성심을 확보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랍의 과학기술은 아랍글자에 의해 발전속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당시 아랍권의 과학기술이 세계를 앞서 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과학의 흐름을 잡기 위해서도 글자의 통일은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셀주크제국 300년, 오스만제국 600년 동안 아랍글자는 아무런 의구심과 저항감 없이 사용됐다. 그런데 오스만제국 말기에 들어서면서 투르크 지식인들 사이에서 아랍글자에 불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만의 원인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언어적인 문제,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이유였다. 먼저 아랍글자의 모음과 자음은 모두 터키어와 일치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의사 전달의 문제가 종종 발생했다. 그러한 이유로 오스만제국 말기에는 아랍글자 표기법이 몇 차례로 수정되기도 했다.
정치적인 이유는 보다 심각했다. 유럽에서 시작해 중동지역까지 불어온 민족주의 바람 속에서 투르크 민족주의는 어디서도 아직 확립되지 못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유학하며 세속화된 오스만제국의 지식인들은 이같은 현실에 낙담했다. 그들은 그 원인 종교에서 찾고 있었다. 반면 더 이상 서구열강을 적이 아닌 협력 파트너로 봐야 한다는 인식 전환이 내·외부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실제 오스만제국 말기 지식인들은 이런 문제들을 지적하고 받아들이려 했지만 제국 내 왕실에서 서구식 개혁에 대한 의지와 여지를 찾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서구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수용하지 못한 오스만제국은 마침내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오스만제국의 후손으로 무대에 등장한 터키공화국의 국부 케말 파샤는 독립전쟁 승리를 통해 얻은 민심을 현대적인 투르크민족주의 확립과 강력한 서구화에 쏟아부었다.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국가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곧바로 서구화정책 시행에 나섰다. 그는 점진적으로 서구문명을 국내에 도입하면서 터키국민들의 경계심을 풀면서 1928년 마침내 아랍글자를 공식 포기하고 라틴글자 공식문자로 선언했다.
케말 파샤의 이 개혁은 아직도 수많은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진보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은 ‘글자혁명’으로 표현하며 “매우 잘된 일”이라고 극찬하는 반면 이슬람 보수세력은 여전히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들은 “케말 파샤의 글자혁명이 터키사람들을 이슬람 문명에서 배제시켰으며, 과거와의 단절을 가져왔다”고 맹비난한다.
필자의 私見은 이들과는 조금 다르다. 모두 글자는 언어의 음성학적인 특성에 알맞게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어를 제일 정확하고 예쁘게 표현할 수 있는 글자는 ‘한글’이다. 아랍어와 같은 자음 중심적인 ‘셈족’ 언어들은 아랍글자로 잘 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아랍글자로는 터키어를 표기하는데는 분명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고 라틴글자도 터키어 표기에 잘 맞는 것도 아니다. 터키어는 한국어와 비슷한 받침법칙과 모음조화 등의 문법구조를 갖고 있다. 즉 한글과 비슷한 문자를 써야 가장 바람직하다는 얘기다.
또 다른 문제는 과거와의 단절이다. 1928년 글자혁명 발표와 함께 공용문자가 모두 라틴글자로 바뀌면서 신세대들은 옛날 서적을 해독할 수 없게 됐다. 그 원인은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아랍글자 사용이 중단되면서 아랍어 전공자나 특별히 이를 배운 사람 외에는 접근기회가 없어진 점이다. 또하나는 번역작업의 속도가 글자개혁 속도를 훨씬 밑돈다는 점이다. 정부가 아랍글자로 된 옛 문서들을 번역하는데는 여러 한계가 많았다.
올해는 터키가 아랍글자를 버리고 라틴글자를 받아들인 지 90주년이 되는 해다. 터키공화국의 현대화 개혁 덕분에 터키는 오늘날 여타 중동국가보다 서구세계로부터 덜 무시당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다만, 한 민족의 기억장치이자 그 민족을 잘 보여주는 수단인 글자의 개혁은 터키의 역사적 사례에서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긍정적·부정적 효과 등에 대해 이모저모 따져보면서 진행되길 바란다. 이런 절차 없이 단행될 경우 자칫 국민들이 글자를 볼모로 서로 싸우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