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쉬의 ‘동조실험’과 칸트의 ‘자연지리학’ 강의 40년

애쉬의 동조실험 이미지<동국제강그룹 블로그>

아시아엔 창간 7년, 타문화 이해·융합으로 400년 지속을

[아시아엔=김명근 ] 미국의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는 인간의 동조 경향에 대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실험은 간단하다. 그림과 같은 두장의 카드를 보여준다. 그리고 왼쪽 카드의 막대 길이와 같은 것을 오른쪽 카드에서 찾으라고 한다. 눈으로 보아도 너무 뻔하다. 답은 C다.

한명의 실험자에게 물으면 정답률은 99%를 넘어간다. 그런데 여러 명의 실험자를 모아놓고 약간의 조작을 하면 결과가 달라진다. 7~9명 정도의 실험자를 모은다. 하지만 이중 진짜 실험자는 1명이고, 나머지는 심리실험을 위한 동조자이다. 그 동조자들이 A가 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1명 정도가 A라고 말하는 것은 별로 영향을 안 미친다. 하지만 2명, 3명이 되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가장 효과가 높은 경우는 앞의 한, 두 명은 C라고 정답을 말하고, 그 뒤 3~4명이 연달아 A가 정답이라고 말하는 경우다. 그 다음 차례가 진짜 실험자다. 머뭇거리다가 나오는 답의 정답률은 63% 정도까지 떨어진다.

동조실험을 통해 인간 심리를 파악한 애쉬.

인간은 주변의 분위기에 동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도 63%나 정답을 말하지 않았느냐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애쉬의 실험은 너무나 뻔한 문제이고, 답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나, 벌칙도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37%나 분위기에 동조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회적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문제라면 정답률은 형편없을 정도로 떨어지게 된다. 이것이 “그릇된 관행이 목숨을 이어가게 만드는 젖줄”이 된다.

어떠한 편견이 그 사회의 주류 의견이 되면 용감하게 일어나 정답을 외칠 사람은 급격히 줄어든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확인된다. 한 사회가 지극히 안정적이며, 외부와의 교류도 별로 없으면 편견은 그대로 유지된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황당한 제도, 사상, 철학이 몇 십년, 몇 백년 유지된다.

그렇다면 사회의 모순을 보고, 이를 개선하는 힘, 제대로 된 정답을 찾아내는 힘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비교다. 자신과 다른 문화, 사상을 자주 접하고 이를 자신의 것과 비교를 하면 역사적인 영향, 지리적인 영향이 눈에 보이게 된다. 이것이 눈에 보여야 비로소 그 밑에 흐르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진실이 눈에 보이게 된다.

임마누엘 칸트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강좌의 제목은 <자연지리학>이었다. 칸트는 평생을 소도시 쾨니히스부르크를 떠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여행기를 즐겨 읽었다. 그리고 이 여행기들의 내용을 정리하여 강좌를 개설한 것이다. 칸트의 강사 생활은 수강생 수에 따라 급여를 받는 무급 강사로 시작된다. 그래서 학생들이 재미를 느낄만한 흥미 위주의 강좌부터 개설한 것일까? 아니다. 정식 교수가 된 뒤에도, 심지어는 <순수이성비판>을 발간하고, 유럽 철학계의 우뚝한 별이 된 뒤에도 그는 <자연지리학>을 계속 강의했다. 무려 40년을.

계몽주의에 대한 칸트의 생각을 보면 그가 <자연지리학>을 계속 강의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칸트는 사상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생각할 수 있는 힘’이라고 말한다. 그는 “미성숙이란 타인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는 능력이 없는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지녀라!”를 계몽의 핵심 구호로 내세운다.

인간의 동조현상은 그 용기를 방해한다. 동조현상을 깨려면 자신이 익숙한 것과는 또 다른 문화가,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운동선수들은 기교를 익히기 전에 체력훈련부터 한다. 칸트에게 <자연지리학>은 지성의 활용을 위한 기초 체력훈련이었다.

11월은 <아시아엔>이 나이를 더하는 달이다. 올해로 만 7살이 된다. 서로 다른 문화, 풍습, 제도를 나눈다는 것, 다른 사람의 삶의 속살을 본다는 것. 이것은 단순히 교양을 넓히고, 상식을 풍부하게 하는 일이 아니다. 남을 보아야 자신을 알 수 있다. 다른 나라를 보아야 자기 나라를 알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을, 사회를 이해하고 개선시킬 수 있는 지성의 힘이 생긴다. 용기가 생긴다.

칸트라는 자연인은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기에, 그의 <자연지리학> 강좌는 40년으로 끝났지만 <아시아엔>은 400년도 지속할 수 있다. 그래야 한다. 인간은 동조경향이 지나치게 높은 동물이고, 이를 견제할 수 있는 등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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