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①] 입센의 ‘노라’, 여성의 ‘통곡’을 ‘함성’으로 해방시키다
[아시아엔=박상설 <아시아엔>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 <잘 산다는 것에 대하여> 저자] “우리들의 가정은 다만 놀이하는 가정에 지나지 않았어요. 여기에서 나는 당신의 장난감 인형 아내였던 거예요.”
필자는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을 오랜만에 다시 펼쳐들고 우리 역사의 그늘에 숨겨진 개화기부터 지금까지의 근대 여성민중사를 되돌아본다.
역사에 담겨있는 여인의 자화상은 권위주의와 남존여비의 인습이 지배적이던 가부장적 제물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세상에 불쌍한 조선여인들은 통곡하며 그 고난을 운명으로만 여기며 견뎌왔다. 개화기 이후 그들의 참혹한 수난현장을 필자는 80년 전, 어렸을 때부터 똑똑히 보아온 터다.
조선 여인들의 통곡소리 들리는 듯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거리트 미드는 후진국 문화는 수직문화와 수평문화 그리고 동일성문화의 3단계로 발전한다고 했다. 수직문화 단계란 개화기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외래문화단계이다. 동일성문화 단계는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를 절충·복합·융합한 것으로 전통도 외래도 아닌 제3의 문화다. 이 제3의 문화시대에 후진국의 문화는 기존의 인습과 새시대의 가치관 충돌로 큰 수난을 겪는다.
<인형의 집>은 이런 사회적인 문제를 한 가정을 배경으로 자유로운 인간적인 삶과 정신적 속박 속에 고뇌하는 인간의 문제를 희곡으로 승화시켰다.
여성해방 페미니스트 희곡의 전형
그렇다면 우리 문화의 위상은 어디에 와있을까? 제2단계인 외래문화 황금시대에 도취해 있으면서 회의가 느껴지는 혼미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이 문화의 전환기 100년을 거치면서 여인들은 비극의 제물이 되고 살기 위해 몸부림쳐온 암혹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배경이 필자가 <인향의 집>을 다시 꺼내든 이유다.
<인형의 집>은 노르웨이 출신 극작가 헨릭 입센이 1879년 51세 때 발표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품이다. 입센은 이 작품을 통해 △사랑이란 무엇이며 △결혼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는 영원한 문제들을 묻는다. 입센은 이런 문제를 가정극 형식을 통해 근대사실극을 확립했다.
입센이 이 작품을 쓴 시대적 배경은 노르웨이 역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시대다. 당시 세계는 새로운 사조의 대전환기를 겪는 때여서 <인형의 집>은 온 유럽의 주목을 받았다. 덕분에 여주인공 ‘노라’는 순식간에 스칸디나비아반도를 넘어 전 유럽의 화제인물로 부각됐다. 이에 따라 입센 자신도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로 인식되고, 이 작품은 이른바 ‘고전사회극’의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남편의 장난감 인형에 지나지 않던 아내
중산층 가정 남성의 부인으로부터 나 홀로 설 것을 단호히 선언하고 집을 나가는 것이 희곡의 줄거리다. <인형의 집>은 당대의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논쟁을 낳았다. 입센의 “오늘날 사회에서 여성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말대로 <인형의 집>은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으로서 불변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입센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며, 이 작품은 현재 셰익스피어의 <햄릿> 다음으로 많이 공연되고 있다.
여성의 자유와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독립을 주제로 삼고 있는 이 희곡의 주인공 노라는 신여성의 대명사가 되었다.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는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남편 헬메르의 사랑을 받으며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준비한다. 결혼 후 8년 동안 남편의 병과 넉넉지 않은 살림으로 생활이 쉽지는 않았지만, 이제 새해를 맞으면서 남편은 은행 총재로 부임할 예정이다. 헬메르는 노라가 그저 철이 없는 아이들처럼 보이는 ‘종달새’라고 부르며 귀여워했다.
여성해방운동의 기폭제
그런 노라에게 학생시절 친구인 린데 부인이 찾아온다. 그녀는 남편이 사망한 후 힘겹게 살다가 도시로 나와 오랜만에 노라를 찾아왔다. 서로 대화를 하는 중에 린데부인이 노라에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온실 안 삶을 산다”고 하자 노라는 발끈하며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게 된다. 몇년 전에 남편이 거의 죽을 병에 걸려서 남쪽 지방으로 요양을 갔을 때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노라는 자신이 친정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하여 남편의 병 치료 경비를 빌렸던 이야기를 한다. 그 어렵던 살림살이에 노라는 바느질일과 서류정리 등의 일거리로 푼돈을 벌어서 남편에게는 알리지 않고 차용한 돈을 몰래 갚아 왔다. 그런 후에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가는 가운데 오랜만에 찾아온 린데 부인의 일자리를 남편에게 부탁하게 된다.
인간미 없는 무미건조한 남편
헬메르는 노라의 부탁을 듣고 린데 부인을 채용해주는 대신에 늘 자기의 눈엣 가시로 여겨왔던 크로그스타드를 해고하려 한다. 크로그스타드는 노라가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하여 돈을 차용한 비밀을 알고 있었다. 크로그스타드는 남들의 약점을 캐내어 폭로하는 등의 비열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그는 직장을 잃을 위기에 놓이자 노라를 찾아와서 남편에게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한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한다.
그러는 정황 속에서 남편의 오랜 친구인 랑크 박사가 노라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일이 생긴다. 그러나 노라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남편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