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개혁개방 40년③] 모택동은 주은래 문병도, 추모식에도 참석치 않았다
[아시아엔=이중 전 숭실대 총장]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를 한번도 문병 가지 않았다. 추모식에도 참석치 않았다. 인민들은 문병과 추모 등 마오의 가시적인 배려 같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 두 사람이 손잡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소박한 인민들의 바램이었다.
그 작은 소망마저 이뤄지지 않았다고 판단되었을 때, 인민은 분노했다. “4인방을 타도하자!”는 격한 시위는 그래서 폭발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마오쩌둥에 대한 변명도 가능하다. 사실 저우언라이 못지않게 마오의 병도 위중하였다. 1972년 1월, 천이(陳毅) 부총리의 장례식에 다녀온 이래 거의 바깥출입이 없었던 마오였다. 그해 겨울, 미국 대통령 닉슨과 만났을 때에도 그는 비서들의 도움 없이는 혼자 일어서지도 못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닉슨에게 미안해했다.?닉슨은 이런 마오를 두고 “그의 영혼은 이미 다른 세계에 가있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특히 마오는 유별나게 자신의 치료를 거부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속 썩였다. 마오쩌둥의 주치의 리즈수이(李志綏)는 마오가 죽은 뒤 미국으로 건너가 <마오 주석의 사생활(私生活)>이란 책을 냈다.
1994년 미국 랜덤 하우스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의 원명은 <The Private Life of Chairman Mao: The Memoirs of Mao’s Personal Physician>, 한국에선 <마오쩌둥의 사생활>이란 이름으로 번역판이 나왔다.
민감한 부분이 많다 해서 중국에서는 판매금지가 된 책이다. 마오의 건강상태에 대해서는 주치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당시 마오의 건강과 관련된 몇 대목을 뽑아보면, 건강 말고도 후계와 관련된 비밀 이야기도 나온다.
1972년 1월 18일, 저우언라이는 마오를 만났다. 그런데 이 자리에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이 함께 있었다. 저우는 이날 리즈수이 의사로부터, 마오가 자신의 치료를 자꾸 거부하니 치료받도록 권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마오를 찾아왔던 것인데 이 자리에 장칭이 나타나서 리즈수이가 몹시 놀랐다는 대목이 나온다. 리즈수이의 증언이다.
“투약일랑 모두 그만두시오. 내게 약을 권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당장 이 방에서 나가시오.” 나는 당혹했다. 약을 쓰지 않는다면 마오는 죽게 될 것이 뻔하다. 마오는 저우에게 말했다.
“지금 내 건강상태는 말이 아니요. 난 이 병이 나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이제 모든 건 당신 손에 달려 있소.” 저우는 놀라고 당황했다. “아닙니다. 주석님의 상태는 그리 심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주석님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마오는 조용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내 병은 고칠 수가 없소. 내가 죽은 뒤엔 당신이 모든 일을 책임지고 해내야 할 거요. 이것이 내 뜻이요.”
저우언라이에게 “책임을 맡기겠다”는 마오의 말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바로 이 말 때문에 장칭 등은 심하게 반발했고 한동안 정국이 시끄러웠다. 그러나 당사자인 저우는 신중했고, 마오의 말을 전혀 확대해석하지 않았다.“이것이 내 뜻이요”라고 강조한 마오의 말을 빌미 삼아 어떤 반응이나 행동이 있을 법도 한데 저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도 마오를 잘 알고 있었다. 마오 권력의 코앞에까지 바짝 다가갔던 류사오치(劉少奇)와 린뱌오(林彪)가 맥없이 죽었다. 1972년 1월이면 미국 대통령 보좌관 키신저가 비밀리에 중국을 다녀간 지 넉달 뒤였다. 닉슨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닉슨의 방중(訪中)은 그해 12월 12일에 이루어졌다. 중미(中美)외교의 핵심은 여전히 저우언라이였다. 그는 영혼을 쏟아 부어 그 일에 매달려 있었다. 마오의 “책임” 운운에 저우는 흔들리지 않았다. 리즈수이는 그 순간을 매우 흥분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지만, 저우의 분별력과 자제력은 남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