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숙 문화재청장의 광주 아시아문화전당 ‘역할과 과제’
이 글은 8월 30일 문화재청장에 임명된 정재숙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가 2013년 9월 문화체육부 주최, 아시아기자협회 주관으로 광주서 열린 ‘아시아문화언론인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아시아엔>은 당시 정재숙 기자가 발제한 ‘아시아문화전당의 역할과 과제’ 전문을 게재합니다. 시점상 일부 다른 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점 고려해 일독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아시아엔=정재숙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한국에는 전당이 많다. 예술의전당, 평화의전당, 늘푸른전당. 여기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까지. 전당은 우선 높고 크게 지은 화려한 집을 말하지만 문화전당의 경우는 두 번째 뜻에 더 걸 맞는다. 학문, 예술, 과학, 기술, 교육 따위의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연구 기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일종의 유행처럼 건물 이름에 붙이는 전당은 본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문화전당)은 광주 문화중심도시조성사업의 핵심시설이다. 다양한 아시아 문화의 교류·연구·교육·창조 및 향유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미래형 복합문화시설을 지향한다. 현재 ?민주평화교류원 ?아시아문화정보원 ?문화창조원 ?아시아예술극장 ?어린이문화원 총 5개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5개원은 각기 독자적인 기능을 하면서 그 기능이 상호 연계, 순화되어 운영하도록 계획되었다. 상당히 이상적인 목표와 다양한 역할 수행을 품고 있는데 그 ‘포괄적인’ 운영 계획이 때로 문화전당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는 요인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전당’에 대해 품는 생각과 의지가 각양각색이어서 그 미래로 가기 위한 현재 진행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5개원 체제는 이런 한계 인식으로 한때 랩(lab) 체제 도입으로 바뀌는 듯 했으나 현재는 다시 회귀하는 분위기다. 문화전당 콘텐츠 수립과 밀접한 체제 문제의 정리는 시급한 사안이다.
문화전당의 역사는 11년 전인 2002년 12월 14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가 ‘광주문화수도 육성’ 공약을 내놓으면서 시작됐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5월 18일 광주를 ‘아시아 문화예술 메카’로 키우겠다고 발표했다. 2004년 3월에는 문화중심도시조성위원회가 발족했고, 9월에는 문화전당 건립예정부지가 전남도청 일원으로 확정되면서 문화수도 원년 선포식이 열렸다.
2005년 12월 국제건축설계경기(현상공모)로 재미건축가 우규승씨의 ‘빛의 숲’이 당선작으로 발표돼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구 전남도청 일원)에서 문화전당 착공식이 있었다. 2014년 완공 예정이었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2015년 7월 ‘부분 개관’으로 가는 분위기다. 개관을 위한 콘텐츠 위주로 몇 개만 뽑아서 진행하는 식이다. 2006년 8월 ‘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이후 벌어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은 문화전당을 ‘오리무중’의 상태로 만들었다.
문화전당 사업에는 2004년부터 2023년까지 20년간 5조 3천억원이라는 대규모 예산이 들어간다. 국비 2조 8천억원, 민자 1조 7천억원, 지방비 8천억원이 투자될 예정이다. 이중 건물 건립 공사비만 7162억원이다. 국고 총 투자액이 4800억원 투입됐다. 그것도 오로지 건물 완공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그 안에 담을 콘텐츠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이렇게 많은 국민 세금을 쏟아 붓고 진행하는 국책사업이 이렇듯 갈팡질팡한다면 큰 재난이 아닐 수 없다.
운용 인력 300여명(추정), 부지 면적 12만8621평방미터(3만8908평)에 달하는 초대형 시설이 속 빈 강정, 거대 공룡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문화전당의 지향점에 대한 ‘이견’과 ‘혼선’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질적인 목표를 지닌 5개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문화복합 공간으로 출발하다보니 자칫 기능과 시설 중심에 무게가 실릴 소지가 있다. 각 지역에 다수 건설된 문화공간들이 건물만 확보하고 콘텐츠에 대한 고민 없이 운영되는 폐해를 이미 겪은 상태에서 문화전당의 고민은 시작됐다. 이벤트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새로 잡은 좌표는 ‘복합공간에서 통섭공간으로’다. 문화현장과 인문사회 담론장의 층과 결이 중첩되는 ‘지식기반시대의 스마트 스페이스’다.
이영철 문화전당 전시예술감독이 아시아문화개발원장 시절 제안한 ‘랩 체제’에 대한 지역 문화계의 반발은 조율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전당을 단순한 콘텐츠 생산지가 아니라 ‘인터페이스’ 공간으로, 지식산업에서 창조산업으로 옮아가는 핵심 기지로 만들겠다는 게 핵심이다. 문화전당 사업에 참여하는 연구자와 창작자와 향유자 모두에게 인문학적 상상력과 지적 통찰을 제공하는 장소로 문화전당을 혼합(place blending)하겠다는 의미다.
문화전당이 단순히 공연, 전시, 축제 등 문화콘텐츠의 결과물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는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보여주기식 행사, 단순 이벤트에서 탈피해 문화가치와 삶의 스타일이 축적된 습관, 특이점으로 기능할 수 있는 정보 등 지식과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는 데 많은 지역민이 공감한다.
특히 타 문화권역(7대 권역)에 비해 일시에 대규모의 자본과 연구진이 투입되는 이런 핵심사업은 광주라는 문화중심도시와 연동되지 않는다면 고립된 섬처럼 닫힌 생태계가 될 위험이 크다. 외부와의 교환과 소통이 없는 문화생태계는 공적 자금의 투입이 끊기는 순간, 스스로의 자생력을 잃고 표류할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된 모든 유사기관의 공통 고민이다.
이런 점에서 찾은 해결책이 문화전당과 도시의 인터페이스 장치들이다. 기획, 창조, 교류를 동시에 수행하는 유기적 문화예술 실험실로서 ‘랩(lab)’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식산업시대인 21세기 패러다임의 변화를 좇을 지식의 융·복합, 단기 아닌 중장기 계획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 한 예로 독일 베를린의 ‘훔볼트 포럼’이 눈여겨볼 만하다. 옛 동독 지역에 있던 19세기 훔볼트 관련 유적을 재건한 ‘융복합 형태 지식박물관’인데 전세계 문화를 대상으로 새로운 지식의 극장, 새로운 문화예술극장을 지향한다.
한국 광주의 문화전당도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지식 실험실로 주목받을 수 있다. 핵심은 자유롭게 활동하는 일종의 창의적인 연구 조직에 대한 뒷받침이다. 조직 스스로 자율적 결정권 갖고 활동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이제까지 서구가 생각하지 못한 아시아적 방식과 사고체계를 이루도록 기존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발상을 밀어줘야 한다.
문화전당 조성 사업의 당면 과제
현재 문화전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가장 큰 이슈는 전당 법인화 문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3년 6월 11일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입법 예고했다. 문화전당을 재단법인 형태로 운영하고 현재의 아시아문화개발원을 아시아문화원으로 바꿔 전당 운영을 맡기는 게 핵심이다. 광주시가 요구하는 문화전당을 국립기관으로 만드는 것이 불가함을 밝힌 셈이다. 광주시는 그동안 문화전당을 ‘정부조직에 의한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기관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어 청와대도 그해 7월 25일 문화전당 운영 형태로 “법인화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모철민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그렇게 큰 기관을 국가가 운영하는 데는 문제가 많다”며 “법인화하되 현실적 대안으로 서울 예술의전당이 평균 20% 정도의 지원을 받는 것처럼 정부지원 비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이 좋다”고 밝혔다.
하지만 광주 지역의 반발은 거세다. 이병훈 전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장은 “정부가 발을 빼겠다는 것이냐”며 “안 되면 돌아가자는 식으로 법 개정을 한다면 기형적인 전당이 될 게 불 보듯 뻔하다”고 일침을 가했다. 노무현, 이명박 정부 시절을 거쳐 온 국책사업을 박근혜 정부가 축소하려 한다면 정치적 오래로 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3년 8월 13일 광주문화재단에서 열린 ‘문화융성위원회’ 토론회에서도 특별법 개정안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또 하나, 옛 전남도청 별관 철거 문제가 걸려있다. 그해 8월 13일 문화전당 공사 과정에서 광주민중항쟁 당시 심장부였던 옛 전남도청 별관 일부가 사라졌다. 옛 전남도청 경비실도 철거됐다. 광주항쟁 유적 보존방안 모색이 필요하다.
2년도 채 남지 않은 문화전당 개관을 앞두고 산적한 과제를 풀 대동단결의 묘수가 무엇일까, 머리를 맞대야 할 시점이다. 광주지역의 문제만으로 밀어두기엔 사안이 너무 크다. 전 국민의 관심사로 환기할 수 있는 전환의 동력이 마련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