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태 수교 60년②] “아버지에게 한국전 참전은 영원한 자랑거리였죠”

참전용사회관에 있는 참전용사 기념비.

2018년은 한국과 태국이 수교를 맺은 지 60주년 되는 해다. 태국은 6·25전쟁 중 군대를 파견해 대한민국을 지켜준 나라다. 1970년 12월 태국은 직전 1966년 대회에 이어 아시안게임을 다시 개최했다. 애초 한국에서 치르기로 결정됐으나 한국의 경제력이 이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우방, 태국 군대의 어제와 오늘을 <공군>지가 찾아갔다. <아시아엔>은 <공군>의 협조로 이를 독자들께 소개한다.

[아시아엔=글 김나청 공군소령·사진 이준건 공군중위] 깨끗하고 말쑥하게 차려 입은 베테랑 자켓과 가슴에 매달린 수많은 훈장들, 왼쪽 어깨에 자랑스럽게 재봉된 태국 국기. 유창한 영어실력과 국제정세를 읽어내는 넓은 시야.

유연하게 대화를 이끄는 세련된 조크. 태국 참전용사들에게는 연륜과 자부심이 묻어났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마치 전장으로 떠나던 그때로 돌아간 듯 쏟아내는 용감무쌍함과 당당함은 노장의 품격을 더해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켜낸 대한민국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했고, 최근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에 대해서도 진심어린 축하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면서도 언제든 남북간의 위기가 발생한다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줄 것이라고 힘주어 이야기했다.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그 후손들을 만났다.

6·25전쟁에 참전한 태국 공군 장병을 찾는 일은 순탄치 않았다. 휴전한 지 어느덧 65년이 지나 당시 참전용사가 생존한 상태라고 가정해도 최소한 80대 중반이 넘는 나이가 된다. 게다가, 공군의 경우 말단 병사가 아닌 조종사, 정비사 등 숙련된 인력이 파병되었음을 고려하면, 이들의 추정 나이는 이미 90대를 넘어선다. 때문에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한국전 참전 공군 장병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태국 공군, 주한 태국대사관, 주태국 한국대사관, 한국전참전협회, 참전마을을 지원하는 종교단체 등 다방면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마지막으로 살아계셨던 공군 참전용사가 지난 3월 숨을 거두었다는 비보를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6·25전쟁 기간 참전했던 태국 육군 및 해군 참전용사, 6·25전쟁 이후 일본 다치카와 기지에 주둔하며 대한민국의 안정과 재건에 기여했던 태국 공군 장병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태국이 생각하는 6·25전쟁 참전용사의 개념이 우리와는 조금 다르다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 전쟁이 발발한 50년 6월 25일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된 53년 7월 27일까지 전투에 임했던 군인들을 참전용사로 간주하지만, 태국군은 전쟁기간 이후에도 대한민국에 주둔하면서 전후복구와 상존하는 위협에 대한 대비, 경제재건에 기여한 장병까지도 한국전 참전용사로 인정한다. 이는 태국에서 취재한 여러 인터뷰 대상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실제로 태국 6·25전쟁참전협회에서는 6·25전쟁에 직접 참가한 장병 이외에도 전후 한국에 주둔했던 장병의 후손에 대해서도 6·25전쟁 참전용사와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지원하고 대우하고 있었다. 후손에 대한 장학금 지원, 장례비용 지원 등에 있어서도 일체의 차별은 없었다.

이에 대해 태국 공군 제6비행단장 폰데치 콘판 대령은 “태국에서 생각하는 참전의 기간은 태국군이 완전히 모국으로 돌아올 때까지다. 전쟁 기간은 3년여지만, 휴전 이후에도 한반도는 여전히 위기에 놓여있었고,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나라를 돕고 회복시키는데 기여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평양과 원산 앞바다서 대한민국 지킨 태국군 참전용사들

텅랏유푼 예비역 육군 대령
번딘 말라이쑨 예비역 해군 제독

“한국전 참전 장병을 모집한다는 정부공고가 붙었어요. 대한민국을 돕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 지원했죠. 생각보다 많은 태국 장병들이 지원했어요. 선발과정을 거쳐서 한국에 파병될 인원이 결정되었습니다. 1950년 11월 부산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겨울이라는 계절을 접하고 정말 놀랐습니다. 저는 바로 평양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정부 기관과 은행, 라디오방송국을 지켜내는 것이 저의 첫 번째 임무였죠.”

텅랏유푼(88·예비역 육군대령)은 6·25전쟁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평양에서 임무를 시작한 텅랏유푼은 이후 전선이 남쪽으로 밀리면서 수도 서울의 방어를 위해 적군의 공격을 지연시키면서 후퇴하는 작전에 투입되어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과 직접 맞설 때도 있었고, 적군이 쏜 폭탄이 차량에 떨어지면서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도 겪었다. 살아있는 6·25 전쟁의 증인인 셈이다.

번딘 말라이쑨(80·예비역 해군 제독)은 6·25전쟁 기간 중 파병된 태국 해군이다. 그는 고령의 나이로 인해 말하고 듣는 것에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 참전의 기억들을 힘주어 이야기했다.

“해군은 전투함 3척과 수송함을 지원했어요. 가장 중요한 임무는 태국 육군의 파병을 보호하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함대지 공격임무였죠. 제가 파병되었을 때는 휴전 이후의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국경선을 보호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어요. 한번은 태국 해군함정이 임무 중 바위에 걸리는 일이 생겼는데 태국 해군은 배를 고의로 침몰시켜 버렸죠. 왜냐하면 북한군에게 우리 장비에 대한 정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어요.”

“태국과 한국, 나라는 달라도 같은 하늘 공유”

위라삭 예비역 공군 중장

“태국은 항상 더운 나라이고, 한국은 추운나라지만, 태국의 하늘과 대한민국의 하늘은 같은 하늘입니다. 그래서 태국과 한국은 절대 저버릴 수 없는 친구지요. 태국 공군은 물자수송과 의무수송을 담당했어요. 일본의 다치카와 기지에서 UN군 소속으로 임무를 수행했는데, 한국에 전개할 일이 자주 있었죠. 한국 주민들도 자주 만났는데, 우리 조종사들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 배식 받은 도시락을 챙겨와서 주민들에게 자주 나눠줬어요. 그럼 한국 주민들도 우리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곤 했죠. 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였어요.”

태국군 한국전참전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위라삭(81·태국 공군 예비역 중장)은 한국 파병경험을 추억하며 대한민국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냈다.

참전협회에서 소장 중인 6·25전쟁 당시 촬영 사진.

“우리는 전쟁이후까지 총 25년에 걸쳐서 한국을 지원했어요. UN의 요청 때문이었죠. 빠르게 발전해가는 대한민국을 볼 때마다 항상 뿌듯합니다. 최근 한반도가 더욱 평화와 번영을 누릴 기회가 온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저는 다시 전쟁이 나도 한국편에서 싸울 겁니다. 그만큼 한국을 사랑하니까요”

“아버지에게 한국전 참전은 영원한 자랑거리였죠”

6·25전쟁 참전용사인 웡 태 티앙탐 중령의 아들, 위사누 태 티앙탐 씨.
웡 태 티앙탐 중령의 군복무 당시 사진.

태국에는 6·25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 방콕 중심에서 약 10여km 떨어진 ‘람인트라’ 지역이 그곳인데, 이러한 형태의 마을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고 한다. 참전용사마을회관 관계자 설명을 빌리자면, 태국 정부에서 6·25전쟁 이후 참전용사들을 위한 복지혜택으로 람인트라 지역의 땅을 싼 이자로 나누어 주었고, 초기에 약 200가구가 모여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땅 가격과 현재의 땅 가격이 100배 차이가 넘기 때문에, 집을 팔고 나간 사람들이 생겨나서 현재는 30~50여 가구가 이 지역에 모여서 살고 있다.

참전용사 마을에서 우리는 태국공군 참전용사들의 후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위사누 태 티앙탐(58)은 웡 태 티앙탐(공군 예비역 중령)의 아들이다. 웡 태 티앙탐은 휴전협정 조인이 막 끝난 1953년 8월부터 1954년 9월까지 파병된 정비장교였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애장품이 있다며 취재진을 이끌었다.

“아버지는 6·25전쟁에 참전한 것을 항상 자랑스러워 하셨어요. 당시 쓰셨던 방탄헬멧을 특별히 아끼셨죠. 원래는 반납을 했어야 하는데 돈을 주고서라도 소장하고 싶다고 공군에 요청하셨다고 해요. 저렇게 항상 집안에 걸어두셨답니다. 여전히 저희 집에 가보처럼 남아있습니다.”

슈랏 니바사붓 중장의 아들인 도스텝 니바사붓 씨.
슈랏 니바사붓 중장이 남긴 유품과 그의 사진.

또 다른 참전용사 후손 도스텝 니바사붓은 슈랏 니바사붓(공군 예비역 중장, 올해 3월 96세의 나이로 별세)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가 기억하는 6·25전쟁과 참전용사 후손으로서 바라보는 한국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버지가 C-47 수송기를 몰고 일본에서 한국을 오가는 비행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태국 공군에서 중장까지 진급할 정도로 아주 성공적인 조종사였는데, 6·25전쟁의 경험을 항상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셨어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저도 공군 조종사가 되려고 했었죠. 하지만 너무 성적이 좋은 나머지 경찰이 되고 말았습니다.(웃음)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많은 관심을 가지고 대한민국을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어요. 최근 남북정상이 만난 것도 알고 있고, 두 사람이 정말 굿 사인(Good Sign)을 했다고 생각해요. 평화는 항상 좋은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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