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성 실장, 5공 김재익 수석을 떠올려보시길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전두환 정부 경제수석 김재익은 경기고 2학년 때 검정고시로 서울대 외교학과에 입학,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은 드문 수재였다. 경제기획원에서 기획국장을 하는 중에 전두환의 요구로 국보위에 파견되어 전두환의 경제 가정교사를 했는데 규제철폐, 물가안정 등 5공의 경제를 주도했다. 전두환은 공부는 많이 하지 않았지만 사람 보는 눈은 빨랐다.
지인지감知人之感이 있었는데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제 1 덕목이다. 김재익은 경제의 문제점과 대책을 전두환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갔다. 요사이 정부에서 박사를 바로 장관에 기용하는 것은 박사의 용도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은 재무부 이재국장과 함께 경제 관료의 꽃이었다. 박정희는 각 부처에서 기안을 올려 맘에 들면 서명은 기분 좋게 해주었다. 이 서명을 믿고 재무부 예산국에 가면 “그냥 놓고 가세요”였다. 각 부처 기조실장이나 차관은 다시 재무부 과장을 상대로 千辛萬苦 고생을 해서 예산을 할당받았다. 박정희의 국정운영 노하우였다.
일본 대장성(大藏省)이 기능하는 방법이었다. 영국에서는 관료에만 맡기지 않고 대강을 주요 각료들이 모이는 성청(Star Chamber)에서 정한다. 한국은 대장성에 전권을 주는 일본 형을 따랐다. 2008년 재정경제부라는 조직이 생겨났다. 이제 국가가 성장을 주도하는 박정희 시대는 갔다는 뜻인지 경제기획원은 없애고 재무부와 합했다.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인 1997년 10월 SK의 최종현은 폐암수술을 받은 직후 산소통을 메고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구조조정 등 비상조치를 호소했다. 안기부에서도 일찍부터 경고를 날렸다. 기업 경쟁력 약화로 인한 수출 감소, 국민의 과소비도 컸지만 김영삼 정부가 1달러에 1000원을 유지하려 한 허장성세虛張聲勢가 결정적이었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열흘 뒤 김영삼은 그를 만나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며 후회했다. 이때 경제수장은 강경식이었다. 미국을 위시해서 일시에 상환요구가 들어오자, 55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경제를 캉드시 등 IMF의 통제 하에 두기로 하였다. 금 모으기 등 국민의 피나는 노력으로 2001년 외환위기를 벗어났지만, 6·25 전쟁 이래 최대의 국난이었다.
김재익과 강경식을 회상하면 오늘의 장하성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