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N 특집-코미디③] 한국···어릿광대, 악극단 없이 웃찾사·개콘 가능했을까?
[아시아엔=김소현 기자] 코미디(comedy)란 본래 사람들을 웃기는 연극, 즉 희극을 뜻한다. 그러나 현재 코미디는 희극만을 뜻하지 않는다. 코미디는 하나의 장르로 볼 수 있으며, 이때 코미디 정의의 핵심은 바로 ‘웃음의 유발’이다. 연극뿐만 아니라 TV 프로그램, 영화, 웹툰 등에서 웃음을 연발하는 말이나 몸짓, 광경 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코미디의 유형도 다양하다. 현재 한국의 코미디는 공포스러운 소재를 통해 유머로 풀어서 말하는 블랙 코미디부터 시작해서 흔히 몸개그라 불리는 슬랩스틱, 마이크 하나로 말로만 웃기는 스탠드업 코미디 등 다양한 형태로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 한국의 코미디는 어땠을까? 한국의 첫 코미디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고려중기의 어릿광대, 한국 전통사회의 코미디언
오늘날 우리 사회에 스타가 있듯이 전통사회에도 스타는 존재했다. 바로 광대들이다. 이들은 재주를 부리던 예인으로, 줄타기, 방울 받기, 땅재주 등 다양한 재주를 선보였다. 사회적 문제를 연극으로 풀어 보여주기도 했다. 처음부터 광대들이 국가의 전문 예술인, 고급 연희 집단을 뜻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광대란 가면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고려시대때부터 뜻이 확대되어서 가면을 쓰고 연희하는 사람들도 광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서 가면을 쓰지 않고 연희를 하는 집단을 광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근데 당시 광대는 주로 줄타기 광대나 판소리 광대를 말했다.
줄광대는 줄타기에서 양쪽 기둥에 줄을 연결한 후 줄 위에 서서 앞뒤, 위아래, 손과 발 등을 이용해 다양한 재주를 보였다. 이때, 밑에 있는 어릿광대와 재담을 주고받기도 했는데 여기서 어릿광대가 한국의 코미디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줄꾼이 줄 위에서 다양한 줄소리를 하며 재담을 곁들일 때 어릿광대들은 재담과 소리로 판의 흥을 돋운 것이다. 이들이 해학적인 재담을 통해 관객들을 웃긴 것이 전통사회의 코미디라고 볼 수 있다.
고려중기에 광대가 있었다면 조선후기에는 사당패가 있었다. 사당패는 일정한 주거 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들의 기예를 팔며 한국 전통연희의 전도사 역할을 한 유랑예인집단이었다. 이들은 해학적인 희극으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곤 했다.
악극단, 한국 현대 코미디의 발생지
현대 코미디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때 탄생했다. 악극이 1920년대에 처음 등장했는데, 이는 곧 한국 현대 코미디의 탄생이라고 볼 수 있다. 악극은 음악으로 표현한 공연을 뜻한다. 서사적 구조를 가진 연극에서 음악적인 부분이 강조된 공연을 말하기도 한다. 초기 악극은 춤과 코미디를 곁들인 음악극으로, 막과 막 사이에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거나 만담을 하는 등 가벼운 공연으로 관객들의 흥을 돋우었다. 막간무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관객들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의 예술 장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전문 악극단도 이때 탄생했다. 가장 대표적인 악극단은 조선악극단이었다.
1950-60년대에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코미디는 더 다양한 형태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라디오와 TV가 상용화 되면서 코미디는 대중화되었다. 소리만 전달할 수 있는 라디오에서 주로 만담 코미디로 이루어졌고, 1960년대 TV시대가 열리면서 코미디는 TV프로그램에서 단막 형식으로 나타났다. 1950년부터 한국영화사가 등장하면서 코미디는 영화의 한 장르로도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1950-60년대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한국 코미디가 부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웃음’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져서 이기도 하다. 1950년대 중반은 6·25 전쟁 종전 후 시민들은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던 시기인데 사람들은 이를 극복하고자 웃음에 대한 요구가 더 높아진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코미디들은 힘든 현실을 웃음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코미디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것은 MBC가 1969년 개국과 함께 ‘웃으면 복이 와요’ 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편성하면서부터다. 이 프로그램에는 악극단 출신의 코미디언들이 나왔으며, 프로그램 형식은 기존의 코미디 형식인 악극과 비슷했다. 악극단 코미디 양식을 TV에 맞춰 나온 프로그램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 한국 초기 코미디 대중 스타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구봉서, 배삼룡, 송해와 같은 코미디언들이 대표적이다. 코미디영화도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미디 영화 역시 악극의 형식과 같았다. 악극단 공연은 보통 1부, 2부로 나누어져 1부는 연극, 2부는 노래와 춤을 보여주는 쇼 형식인데 이 구성은 이 시기의 코미디 영화에서 그대로 찾아볼 수 있다.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1959)가 대표적이다.
1970년대, 코미디 침체기
1970년대는 코미디언들에게 있어 암울한 시기였다. 이는 1971년 국가비상사태 선포, 1972년 유신개헌이 등장하며 표현의 자유가 사라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1977년에는 코미디 폐지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1970년대는 1980년대에 한국 코미디가 정점을 찍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디딤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코미디 프로그램들로 ‘코미디 극장’, ‘일요일이다, 코미디 출동’, ‘고전 유모어 극장’, ‘살짜기 웃어예’가 있었다. 특히 TBC의 ‘살짜기 웃어예’는 일부 PD들이 한국 개그의 시초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인 코미디언들은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정부가 코미디 프로그램이 저질스럽고 대중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며 1975년 저질 코미디 방송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검토했다. 이어서 1977년 10월 코미디 폐지령이 나오면서 실제로 보름 동안 방송에서 코미디가 사라지기도 했다. MBC에서는 ‘웃으면 복이 와요’와 ‘비둘기가족’을, TBC에서는 ‘고전유모어극장’과 ‘가는정 오는정’을 개편과 함께 없애도록 방침을 만들었다. 그러나 여론의 비난으로 인해 코미디 프로그램 폐지 여부는 방송사에서 자율적으로 판단하라고 지시했고, 방송사들은 코미디 프로그램을 축소하되 일부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갔다.
1980년대, 한국 코미디의 전성기
1980년대는 바야흐로 한국 코미디의 전성기라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코미디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곤 했다. 방송사의콩트 프로부터 시작해서 스탠드업 코미디, 시사 풍자 코미디도 이때 등장했다. 이때의 스탠드업 코미디는 이주일이나 김형곤이 만담 코미디형식으로 보여줬다. 시사 풍자 코미디에서는 MBC의 김병조, KBS의 김형곤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정치와 재벌과 같은 소재를 가지고 풍자하곤 했다. 코미디가 다양하게 나타나면서 자연스럽게 스타 개그맨들도 탄생했다. 심형래, 임하룡, 김형곤이 대표적이다. 특히 심형래는 바보연기로 유명했다.
1980년대는 한국 코미디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혁명이 일어난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1980년대는 본격적으로 개그세대가 등장했는데 이때 한국 코미디 판은 코미디언에서 개그맨으로 전환했다. 여기서 코미디와 개그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로 보았을 때 ‘코미디’란 웃음을 주조로 하여 인간과 사회의 문제점을 경쾌하고 흥미 있게 다룬 연극을 뜻하며, ‘개그’는 연극,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따위에서 관객을 웃게 하기 위하여 하는 대사나 몸짓을 말한다. 하지만 이 두 개념 모두 ‘웃음의 유발’이 핵심이라는 데에 같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문화권에 따라 코미디와 개그라는 용어를 받아들이는 개념이 다르다. 한국에서는 코미디는 행위로 웃기는 것, 개그는 대사로 웃기는 것으로 보면 된다. 한국 개그는 전유성이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이때 대표적인 코미디 프로그램들인 ‘살짜기 웃어예’, ‘유머 일번지’, ‘청춘 만만세’, ‘일요일 일요일 밤에’을 통해 대중들은 개그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형곤, 이주일, 최양락, 심형래, 이경규와 같은 개그맨들이 이때 뜨게 된 것이다. 방송사에서 개그맨 공채시스템도 이때 도입이 되었다. 이 시기에 개그맨 MC도 처음 탄생하기도 했다. ‘일요일 밤의 대행진’의 김병조를 시작으로 주병진과 같은 개그맨 MC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2000년대, 개그맨 MC와 공개코미디의 전성시대
1990년대부터 개그맨 MC들이 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이경규와 서세원이 대표적인 MC다.
코미디언이 코미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유머 일번지’에서 바보연기로 유명했던 심형래는 1993년 영화사 ‘영구아트무비’를 설립해 ‘영구와 공룡 쭈쭈’, ‘티라노의 발톱’, ‘용가리’ 등을 직접 연출·제작했다. 특히 심형래는 용가리를 개봉한 1999년에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0년대에 개그맨 MC들의 활약은 2000년대에도 이어진다. 이경규, 강호동, 유재석이 대표적인 MC다. 이들은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의 MC자리를 다 꿰찼다.
2000년대는 본격적인 한국 공개 코미디쇼의 시작이기도 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KBS의 ‘개그콘서트’, SBS의 ‘웃찾사(웃음을 찾는 사람들)’, MBC의 ‘개그야’는 다 이때 탄생했다. 이 중 KBS ‘개그콘서트’는 1999년 9월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시작해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 향후 10년동안 예능 시청률 1위를 지켰다.
2000년대에 코미디 TV프로그램들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2011년을 기점으로 또 하나의 코미디 붐이 탄생했다. 2011년에 tvN이 ‘코미디빅리그’와 ‘SNL 코리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두 프로그램은 기존의 지상파 개그 프로그램과는 포맷이 달라 관객들이 신선하게 느꼈다. ‘코미디빅리그’는 코미디 프로그램인데 서바이벌 형식으로 진행돼 시청자들은 리얼함과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었다. ‘SNL 코리아’는 19금 코미디쇼를 보이며 당시 한국 코미디 시장에서 획기적이었다. 특히 ‘SNL코리아’의 속시원한 정치 풍자 코미디는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기 충분했다. 2012년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풍자한 ‘여의도 텔레토비’ 코너가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이 코너는 박근혜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이내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