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아흔살 청춘②] 전 세계서 가장 좋았던 캠핑장소 3곳···로키산맥·알래스카·유콘강

버려진 것들은 스스로 아름답다

[아시아엔=박상설 <아시아엔>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 캠프나비 대표] 사람들은 캠핑을 즐겨 해온 내게 가장 좋았던 곳이 어디냐고 묻곤 한다. 그들의 질문에는 도시 속 환상을 그리는 마음이 보이지만 나는 이렇게 답한다. “좋았던 곳이 너무 많아 다 말할 수 없고, 좋았던 곳은 알고 보니 이제는 모두 시들해졌으며, 진짜 좋았던 곳은 딱 세 군데”라고.

캐나다의 로키산맥과 알래스카의 외로운 자작나무숲과 백야 그리고 유콘 강과 웅장한 빙하, 호숫가에서의 캠핑···. 정처 없이 떠도는 빈한한 이들과의 만남, 그들과의 노숙.

여행은 때로 거지가 되는 일이다. 나는 때때로 떠돌이들과 한패가 되었다. 단돈 2달러로 총탄이 난무하는 뉴욕 할렘가를 떠돌거나 거지들의 나라 인도에서 노숙하면서 진짜 사람들을 만났다. 천덕꾸러기로 나뒹굴어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 후로 나는 똑같은 나날을 꼬박꼬박 사는 일을 부끄럽게 여긴다.

어찌하다 여기까지 흘러왔는가? 또 어디로 떠나가야 하는가? 구속이 자유다. 여행은 가슴 저리는 일이다. 덧없음을 겪는 일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부담 갖지 말자. 나의 여행은 저절로 된 것들, 제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일이다.

꼼짝없이 자연에 버려져 자생하는 것만을 좇아 마음을 풀어 노는 표류 인생이다. 가능한 한 기능적 문명을 뒤로하고 자연의 향기와 듬뿍 놀 일이다. 숲과 사막에 누워 느끼고 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열 번 배우고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해보면 안다. 교실에서 감성을 배웠다는 자유인은 보지 못했다. 차로 그냥 지나치는 것과 잠시라도 머무는 것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사막의 무의미한 것들이 가진 힘은 무섭다. 사막의 외로운 황홀함에 우주만큼이나 헤아리기 어려운 나의 내면세계는 이유 없이 사뿐해진다. 나는 사막에 투항하며 중얼댄다. ‘아무도 없는 나 혼자여야 한다’고…. 인생의 총체적 뜻은 하잘것없는 막막한 모래 들판에 있다.

타르사막 지평에서 마지막을 고하는 석양은 허무와 두려움과 비통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미국 서부의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 사막 지대에서도 여러 날을 보냈다. 오토캠핑과 기차여행을 통해 미국 대륙을 횡단한 것도 네 차례다.

한여름 낮 기온이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열사의 광막한 땅이지만 해가 지면 시원해지고 한밤중에는 한기마저 들었다. 공허하고 아득한 사막이지만 습기가 없어 밤은 쾌적하고 더 없이 상쾌하다. 밤이 깊을수록 찬란한 별들이 손에 잡힐 듯 마구 쏟아진다.

한번은 사막 등산에서 어이없이 당한 적이 있다. 산이라야 불과 100미터 높이 이내의 돌덩어리뿐이었다. 걷다보니 지평에서 보이지 않던 거대한 계곡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그 깊이가 무려 1000미터를 넘었다. 그런데 계곡 밑으로 산이 꽂혀 있는 게 아닌가? 그 지옥 같은 역산행을 섭씨 50도의 땡볕을 뚫고 해내야 했다.

나를 몰아세우는 황량한 사막 바람에 맞선 도전은 두고두고 사막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로키의 길은 거의 수직 길을 피하고 지그재그로 뻗어 있다. 빨리 오르는 게 아니라 천천히 자연을 음미하며 걷게 돼 있다. 어딜 가나 산이 험악해서겠지만 트레일 곳곳에 “길을 벗어나지 말라”(Stay at Trail)’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나는 웅장한 빙하의 경관에 압도당해 마냥 서 있었다. 대평원의 자작나무숲, 하늘로 치솟은 숲에 둘러싸인 수많은 호수들…. 그때 도도히 흐르는 흙탕물의 유콘 강에는 천지를 뒤흔들며 거대한 나무들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여름빛이 저물며 강의 힘찬 울음소리가 거세지자 북극의 한지에서만 사는 아주 작은 모기떼가 습격했다. 가히 살인적이었다. 미리 준비해 간 모기장을 해먹에 달아매고 유유히 북방 하늘 아래서 한여름 밤의 꿈을 즐겼다. 더위는 멀찌감치 물러나고 때 아닌 가을을 즐겼다. 자정이 넘어도 밤하늘은 초저녁처럼 환한 백야였다.

빙하를 이고 있는 산 위 하늘에 찬란한 오로라가 형형색색의 빛을 띠고 휘~ 우주의 울림소리를 내며 화살처럼 퍼져 백야를 덮쳐 사라졌다. 어찌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내가 있는 곳조차 알 길이 없었다. 떨고 있었다. 호숫가 전나무 사이의 풀숲에 텐트를 치고 백야의 밤을 하얗게 보내며 오로라를 기다렸다.

나는 언제나 사막과 북극 그리고 떠도는 사람들과 같이하고 싶다. 허허롭고 광막한 곳에 나를 홀로 버리는 적막의 자유를 무엇으로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규제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인위적인 것이나 화려한 대상에서 제외됐을 때 나는 살아 있다. 이는 소박한 것과 맞닥뜨려 은유적 상징으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이다.

내가 캠핑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극지를 떠돈 것은 여행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앞둔 나를 버리러 갔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엄두가 나지 않는 무서운 길을 마구 쏘다녔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만용은 선험적 기억에만 의지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을 모험하는 호기에서 비롯하는가?

나는 눈앞의 절벽을 두려워하지 않는 내 자신이 가엽기까지 했다. 버려진 들녘마다 이름 모를 꽃들이 파도치는 북극에서 소진되고 싶었다. 기억 없는 기쁨, 기억나지 않는 슬픔, 후회할 수 없는 깨달음의 희열 등 모든 발자취가 꿈의 행로였다.

버려진 것들은 너무 아름다웠다. 저절로 된 것들, 제 스스로 그러한 것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허전하고 쓸쓸했다. 자연에는 디자인이 없다.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심플함이 전부다. 자연이 하는 일은 모두 옳다.

짧지 않은 여로에서 사막에 눕고 빙하를 탐험하는 여정은 험난했지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간 길은 여한이 없다. 길 위에서 마주친 헐벗고 가난한 이들, 이 순간에도 길 위를 헤매고 있을 그 빈한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여, 너무 외롭거나 아프지 마라!

세상 끝에 걸친 그대들의 고통, 그리고 나의 방황도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 전해주지 못하는 나의 삶이 비열하고 비통하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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