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김영란 전 대법관①] 한때 소설가 꿈 꿔 ‘문門’ 서울대 교지에 발표

 

<사진=뉴시스>

[아시아엔=박수진 <서울대총동창신문> 기자] “여성 최초 대법관, 변호사 개업 안한 전직 판사, 소수자의 대법관···.”

김영란 전 대법관에게 붙는 수식어들이다. 더 있다. 원래 이름보다 그의 이름이 붙은 ‘김영란법’으로 알려진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의 최초 발의자다.

최근엔 국가교육회의 공론화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2022학년도 대입제도 개편을 위해 브레인스토밍을 주도하고 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국민권익위원장 퇴임 후 서강대 석좌교수를 맡아 판례연구를 지도하고 있다.

그는 대법관 재임 당시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 권리와 환경권·노동권 등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강조한 판결로 유명하다. 여성의 종중원 자격을 인정하는 판결과 성전환자의 호적정정을 허가해야 한다고 낸 다수의견, 학교의 종교행사 참여 강요는 종교자유 침해라고 판단한 ‘강의석 사건’ 등이 그의 대표적인 판결이다.

그는 특히 2010년 대법관 퇴임 후 관행적인 변호사 개업 대신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부임해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국민권익위원장 재임시인 2012년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발의, 2016년 시행 이후 그간 사회적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돼 온 부정청탁을 근절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조배숙 국회의원 등과 경기여고·서울대법대 동기로 절친한 사이다.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가정법원·서울지방법원·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 등을 지내고 2004년 48세의 나이로 대법관에 임명됐다. 서울지방법원 판사 시절 서울지검 검사였던 강지원 변호사와 결혼해 두 딸을 뒀다. 국내 최초 판검사 부부로도 화제가 됐다.

그는 한때 독문학을 전공하고 문학평론가의 길을 가고 싶었다고 한다. 김 전 대법관은 서울대 교내 소설 공모에도 당선된 적이 있다고 한다. 서울대도서관에 소장된 1976년 서울대교지 <서울대> 창간호에는 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다. 그가 서울대 졸업생이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하는 관악대상(2018년)을 수상했다. 그동안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김빛내리 교수, 홍성대 상산고 이사장, 박재갑 서울대 의대 교수 등 쟁쟁한 이들이 이 상을 받았다.

먼저 관악대상 수상 축하인사부터 했다.

“영광이다. 한편으론 공무원으로 제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상을 주셔서 송구하기도 하구. 법관으로선 재판에 임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고 했지만 많이 부족했다. 권익위원장으로선 우리나라의 세계적 위상에 걸맞은 제도를 갖춰서 백년을 대비하려고 했지만 그 또한 많이 부족했다. 특별히 자신을 희생하면서 한 일도 아니라 민망하고, 대단치 않은 일들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다.”

소감을 묻고 바로 1학년 때(1975년) 서울대 교지에 발표한 소설 복사본을 건넸다. 뜻밖의 추억을 접한 김 전 대법관은 “창피하다”면서도 반가운 얼굴을 했다. 소설 <문>(門)의 첫머리는 이렇다. ‘나는 조금씩 문을 닫고 있었다. 문을 닫아 가는 것-그건 물론 내 스스로 택한 바가 아니었다. 사실 내가 택하고 말고 할 처지도 아니었다. (중략) 문을 닫아 가면서 난 두려워하고 있었다.’

-소설을 쓸 정도로 문학청년이셨다.

“1학년 여름방학 때 교지를 만든다고 해서 하나 써본 거다. 습작도 안 하고 거의 처음 쓴 글이다. 고등학교 때 신문 편집위원 맡아서 기사 쓰고, 학교 백일장에서 장원 한 번 해본 정도였다.”

-어떤 생각을 소설로 쓰셨나.

“당시에 고민이 많았다. 법대를 갈 건지, 고시공부를 할 건지. 서울대 사회계열로 입학해 법대는 2학년 2학기부터 다녔다. 법 공부는 싫은데 집에선 법대를 가라고 하고, 학교 다니기 너무 싫었다. 이때 쓴 소설이 하나 더 있는데 제목이 <덫>이다. 4학년 때 법대 문우회지 피데스에 실렸다. 현재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다, 뭘 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할까. 이런 정리 안 된 생각들을 글로 표현했던 것 같다. 카프카 책을 즐겨 읽었기 때문에 약간 카프카 풍으로 썼을지도 모른다.”

글 재주가 앞서는만큼 책도 많이 낸 편이다.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창비), <김영란의 열린 법 이야기>(풀빛), <김영란의 책 읽기의 쓸모>(창비), 공저로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쌤앤파커스), <김영란법 김영란에게 묻다>(풀빛)가 있다.

-대법관까지 지냈는데 법 공부를 싫어했다니 의외다.

“남을 판단하고, 판결하는 일이 지금까지도 적성이 아닌 것 같다. 공부하고 책 읽기 좋아하니까 그런 일을 계속 하는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글을 쓸 수도 있었을 텐데.

“교지에 실린 걸 보고 <꺼삐딴 리>를 쓰신 전광용 교수님이 연락을 해오셨다. 찾아뵀더니 앞으로 소설 쓰라고…. 등단할 글재주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글을 써도 문학작품은 못 쓸 것 같다. 꼭 문학일 필요도 없는 것 같고.”

-서울대 관악캠퍼스 첫 세대로 학교 첫인상은 어땠나.

“썰렁하고 황량하고, 너무 추웠다. 수업도 제대로 진행이 안 됐다. 70년대니까. 입학하자마자 한 달 만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땐 교문이 없고 경찰은 캠퍼스 내로는 진입하진 않던 시절이다. 데모가 일어나면 경찰들이 학교 앞을 다 막고 학생들은 돌을 던지던 풍경이 생각난다. 학교에 아무것도 없어서 서클 모임도 대학로 옛 서울 문리대 캠퍼스까지 가서 했다.”

-당시엔 여학생도 많지 않았을 텐데.

“사회계열 여섯 개 반 통틀어 여학생이 세 명이고 우리 반엔 나 혼자였다. 법대엔 여학생 화장실도 없었다. 여성들에게 직업 롤모델이 거의 없을 때다. 선생님이나 은행원 정도? 전문직 여성이 돼야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고시 공부는 어디서 했나.

“거의 학교 도서관에서 했다. 지금도 있나 모르겠는데 음향도서관이라고, 음반 죽 놔두고 헤드폰으로 신청곡을 들으면서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안쪽에 있었어요. 시설이 굉장히 좋았어요. 공부하기 싫을 때 가서 음악 들으면서 공부했죠. 클래식을 좋아해서 브람스 교향곡을 많이 들었어요. 밤 아홉시 반쯤 되면 도서관에서 상도역까지 태워다주는 학교 버스 타러 나왔어요. 열 시까지 앉아 있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저는 그 삼십분도 못 견디겠어서(웃음).”

-조금은 특별한 학생이었을 것 같다.

“4학년 초 사시에 합격했다. 또래들 중엔 빨리 붙은 편이다. 합격했을 때 다들 ‘공부도 열심히 안 한 것 같은데, 어떻게 붙었지’ 하는 분위기였다. 3학년 때 1차 시험 합격한 게 아까워서 하는 수 없이 3학년 겨울방학부터 봄에 보는 2차를 준비했다. 집중해서 하긴 했지만 바로 합격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때 남학생들이 내린 결론이 ‘평소에 글을 좀 쓰더니, 답안지를 잘 썼나보다’. 정말 그랬는지도 모른다.”

-법대가 사라졌는데 아쉬움은 없는지.

“법대가 꼭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서울대가 어떤 경쟁을 목표로 하기보단 역시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서울대는 정말로 힘들고 어려운 아이들을 데려와서 최상의 교육을 시켜주는 기관이 돼야 하지 않을까. 이상적인 말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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