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경찰 ‘잔혹사’···미국 NYPD 120년 ‘차별과 냉대’

[아시아엔=김중겸 전 경찰청 수사국장] 1891년 링컨의 공화당 지지자 많이 사는 브루클린에 흑인 윌리 오버튼(Wiley Overton)은 이같은 정치 분위기 발판삼아 흑인경찰관 처음 채용됐다.

경찰서에서 근무 시작하며 흑인 많이 사는 지구만 순찰케 됐다. “이거야 뭐 탓할 거 있나. 흑인이니까 흑인지구 맡기는 거니까” 백인동료들은 오버튼이라는 사람이 있는지, 그가 경찰관인지, 지금 근무하는지 전혀 모른 체했다. 오버튼은 그같은 외면에 지쳐 1년 좀 지나 퇴직하고 말았다.

1892년 흑인 모세스 콥(Moses Cobb)와 존 리(John Lee)가 브루클린 경찰관이 됐다. 1898년 브루클린이 뉴욕시와 합병해 뉴욕시경(NYPD)으로 소속 변경.

NYPD 채용 첫 흑인경찰관

샘 배틀(Sam Battle)은 뉴욕 그랜드센트럴 기차역 포터 redcap의 부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주급도 좋았지만 팁도 후했다. 누구나 탐내는 좋은 직장이었다.

NYPD 경찰관인 매부 모세 콥은 경찰관 되기를 권했다. “길게 보면 아무래도 짐꾼보다야 경찰 아니겠냐.” 가족들도 덩달아 경찰관 되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응시해 좋은 점수로 합격했으나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흑인 일부에게서 생기는, 특이한 심장질환이 문제였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실직자 신세’가 될 판이었다.

1911년 28세에 전문병원 찾아다녔다. 정밀검사 받았다. 문제없다는 진단서 받고 흑인 정치가, 교회 지도자, 할렘 유력자를 동원해 신체검사 다시 받아 통과, 채용됐다.

놀림거리에 관광명소

처음 업무는 네거리 교통정리였다. 지나가는 동네 아이들이 신기해했다. “저기 있다, 저기! nigger cop(검둥이 순경)이다!” 소리쳤다.

불량 청소년들은 빈 깡통이나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학교 가고 오는 길의 놀림거리였다. 반응 보이면 더 할 거 같아 무시했다.

어느날 관광객을 태우고 뉴욕 시내를 일주하는 관광버스 한 대가 교차로에 정차했다. 다 내려서 네거리 한가운데를 쳐다봤다.

안내원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손짓까지 해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무슨 얘기 했는지 깔 깔 깔 웃기도 했다. 아니, 저 사람들 뭘 보고 저러지?

뭘 보긴, 베틀 너를 보는 거지. 어느새 흑인순경 베틀은 관광자원이 되어 있었다. 관광버스가 꼭 들리는 관광명소!

엉덩이 붙일 곳 없었다

당번 때야 길거리 자기 구역(beat)에 나가 있으면 된다. 비번 때는 쉬는 거니까 집에 있는 거다. 문제는 8시간의 대기였다.

물론 대기할 곳 즉 대기료가 경찰서에 있었다. 그곳의 대기자는 그 하나 빼고 모두 다 백인.

흑과 백. 색깔 차이나고, 냄새 다르고, 생각과 행동 틀리고 열등인간으로 보기도 했다.

백인 경찰관들은 침묵(silent treatment)으로 시종일관하며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쉬거나 잠시 눈 붙일 공간은 없었다.

where a Negro cop sleep.

적당한 곳 어디 있나. 찾으러 다녔다. 옥상 국기보관소 안에 작은 공간 발견. 몸 눕히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온 신경은 아래층으로 향했다. 출동 호루라기 소리에 귀 기울였다.

출동명령 떨어지면 후다닥 장비 갖췄다. 경찰트럭 오기 전에 달려 나갔다. 소방서 앞에 서있던 백인 소방관. “저기 베틀이 간다! 오늘도 제일 먼저다!” 외쳤다.

언제나 앞장섰다. 경찰관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지원(back-up)했다.

잘 달리는 거구의 그에게 점점 우군들이 생겨났다. 시민들이 먼저 칭찬하기 시작했다. 상관들이 좋아했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하고,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2년 지났다. “Hello, Sam”이라 부르는 동료가 생겨났다. 뉴욕시경 경찰관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였다는 신호였다. 그래도 안심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대기료에서 가면 중이었다.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베틀이 철도재벌 벤더빌트가 밀어서 경찰됐다는구먼.” “그래? 굉장히 든든한 백이 있었구먼.”

베틀은 그 소문에 대하여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시간 흐르자 든든한 백의 소유자라는 설이 정설로 정착, 무시하는 분위기도 가셨다.

승진해야 하는데

1916년 흑인경찰관이 NYPD에 모두 15명. 전부 순경이었다. 뉴욕인구의 절반 정도 규모인 시카고에는 경위 1명과 경사 10명을 포함해 모두 131명이었다.

1919년 9월 11일 샘 베틀 순경은 경사승진시험 볼 연한은 됐다. 승진시험학원(Delahanty cram school)에 수강을 신청했다.

다른 학생들=백인경찰관의 찬반투표 거쳐야 한다. “기다려라.” 여기서도 흑백차별.

9월 16일. 사복차림의 비번 백인경찰은 흑인들이 행인 놀리고 괴롭히는 걸 목격하고 이를 말리자 그를 구타했다.

출동명령 내리자 베틀이 바로 뛰어나가 구출했다. 이 얘기 들은 백인 학원생들은 수강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승진시험 합격해도 흑인은

경사승진시험에 상위 순번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흑인은 시기상조라며 임용해 주지 않았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여성은 더 심했다.

1800년대 초 여성은 유치장 간수(prison matron)으로 치안분야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부녀자와 청소년을 돌봤다.

1891년 시카고경찰에 마리 오웬스(Marie Owens)가 첫 미국 여성경찰관이 됐다. 이후 대도시 경찰에서 채용해 나갔다. 1차 세계대전 때 남성들은 전쟁터로 나갔다. 일손 부족을 여성이 채웠다.

1963년 NYPD 순경 펠리시아 스프리처(Felicia Spritzer)는 “여성은 승진시험 불가”라는 방침에 대하여 NYPD를 고소했다. 법원은 여성순경 손을 들어줬다.

1964년 Spritzer와 거트루드 쉬멜(Gertrude Schimmel)이 경사승진시험 합격해 후배들의 길 열렸다.

베틀은 승진을 포기하고 형사가 되기로 작정했다. 수사국장은 형사적성 테스트한다며 유치장에 강도용의자로 위장해 들어가 정보 빼내라 했다.

신분이 들통 나 수감자들에게 붙잡혔다. 죽기 직전에 탈출해 형사가 됐다. 국장 바뀌자 다시 순찰근무로 좌천됐다.

1926년 청장이 바뀌자 경사가 됐다. 수사형사로 할렘 근무. 1935 용케 경위에 올랐다. 여기서 끝이었다. 경감 빈자리 있었으나 끝내 승진시키지 않았다.

그 무렵 NYPD 흑인경찰은 경위 베틀과 경사 2명 포함해 125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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