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조오현 스님의 선시조⑥] 밤마다 비가 오는 윤사월도 지쳤는데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보니/온 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지난 5월 26일 오후 열반하신 조오현 큰스님의 열반송입니다. 평생을 구도자로서, 시조시인으로서, 무엇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따뜻한 이웃으로 생을 살아온 오현 큰스님. ‘아득한 성자’ ‘인천만 낙조’ ‘침목’ 등 숱한 애송시를 남긴 그의 문학적 성취를 배우식 시인의 연구를 통해 돌아봅니다. <편집자>
[아시아엔=배우식 시인] 시조의 형식은 4음보격 3장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4음보(音步)가 세 번 반복되어 3장(章)을 이루는 것이다. 초장과 중장은 각각 4음보 한 장에서 각 음보는 3음절 내지 4음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통상적이지만, 독특하게도 종장의 첫 음보는 3음절로 고정되어 있고, 둘째 음보는 5음절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음보는 한 걸음 걸을 때의 율격을 말한다. 각 장의 4음보는 2음보의 중첩으로 두 개의 구(句)로 나누어질 수 있다.
시간적 등장성(等長性)에 근거하고 있는 ‘음보’는 시조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다. 이 음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정형의 실제 적용에서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시조의 형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음보란 음절이 모인 것 또는 행을 이루는 단위로 정의할 수 있다. 물론 음보율이란 이 음보의 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율격이다. 다시 말하면 음보의 규칙적인 반복이 음보율이다. 시조의 형식적 양상이 음보의 운용과 시조 행의 배열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므로 이를 주요 기준으로 하여 조오현 선시조의 형식적 특징을 고찰한다.
조오현 선시조의 형식적인 특징을 정격(正格)의 형식과 변격(變格)의 형식, 그리고 파격(破格)의 형식으로 분류하여 구체적인 작품을 통하여 살펴보자.
조윤제는 시조 한 수를 ‘전체 자수 45자를 중심으로 한, 41~50자의 신축성을 허락하는 기준형’을 제시한다. 그러나 조동일은 『한국시가의 전통과 율격』에서 “전체의 4% 정도에 해당하는 것을 전형으로 삼는다면 시조는 실상과는 다르게 이해되고, 시조 창작의 방향도 왜곡된다”고 했다. 그는 또 “음수율로서 시조의 자수를 헤아려야 했던 이유는 우선 시조 창작을 위한 지침을 제공하려는 데 있었는데 잘못된 지침은 창작을 부당하게 구속하기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결론적으로 “시조는 4음절을 기준으로 한 6구 12음보, 즉 3장이 각각 2개의 구와 4개의 음보로 이루어지는 4음보격의 율격시로 밝혀진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4음보의 반복에 따른 연첩의 율격체계가 보편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고, 4음절을 기준으로 한 ‘3장 6구 12음보’가 평시조의 기본형이 되며, 과거의 설득을 수정한 학계의 통설”이라고 한다.
시조형은 일반적으로 3장 45자 내외로 구성된 정형시로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자수 개념은 형식장치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고시조의 많은 작품 중에서 겨우 약 4~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땅히 다른 기준에 의해 그 형식장치를 규명해야 할 텐데 이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풀어놓은 논저가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검토가 뒤따라야 할 터다.
이 글에서는 ‘3장 6구 12음보’를 기준형으로 하여 종장의 첫 구절을 제외한 각 음보간에 약간의 가감이 있는 것까지도 정격(正格)으로 보고, 조오현 선시조의 형식적 특징을 탐구한다.
①
봄도 이름 내 서창(書窓)의 파초 순 한나절을
초지에 먹물 배듯 번지는 심상이어
기왓골 타는 햇빛에 낙숫물이 흐른다.
― 「조춘(早春)」 전문
②
건져도 건져내어도 그물은 비어 있고
무수한 중생들이 빠져죽은 장경(藏經) 바다
돛 내린 그 뱃머리에 졸고 앉은 사공이여
― 「암두도자(巖頭渡子)」 전문
③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
― 「부처―무자화 6」 전문
④
진작 찾아야 할 부처는 보이지 않고
허공에서 떨어지는 저 살인도(殺人刀) 저 활인검(活人劍)
한 사람 살아가는데 만 사람이 죽어 있구나
― 「조주대사(趙州大死)―만인고칙 4」 전문
⑤
하늘에는 낙뢰소리 땅에는 낙반소리
한 장 거적떼기로 덮어놓은 시방세계
그 소리 다 갖고 살아라 그냥 숨어 살아라.
― 「북두장신(北斗藏身)―만인고칙 6」 전문
시조의 3장 분장 형식은 시조의 고정적 구성원리이다. ①에서 ⑤까지의 작품은 단시조 형식의 선시조로서 각장에 배열되는 4음보가 한 행을 이루어 3행 3장의 정격을 이루고 있다. 3장 45자 내외로 구성된 음수율의 초장 3·4·3(4)·4, 중장 3·4·4(3)·4, 종장(終章) 3·5·4·3을 기준으로 하여 적용해도 거의 완벽히 일치하는 정격의 선시조이다. ④의 초장 “진작”과 ⑤의 중장 “한 장”만 약간의 음보가 줄어드는 형태를 나타낼 뿐 ①에서 ⑤까지 모든 작품들이 과음보 하나 없이 완벽한 정격을 나타내고 있다.
⑥
비슬산 굽잇길을 누가 돌아 가는 걸까
나무들 세월 벗고 구름 비껴 섰는 골을
푸드득 하늘 가르며 까투리가 나는 걸까
거문고 줄 아니어도 밟고 가면 운(韻) 들릴까
끊일 듯 이어진 길 이어질 듯 끊인 연(緣)을
싸락눈 매운 향기가 옷자락에 지는 걸까
절은 또 먹물 입고 눈을 감고 앉았을까
만첩첩(萬疊疊) 두루 적막(寂寞) 비워둬도 좋을 것을
지금쯤 멧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는 걸까
― 「비슬산 가는 길」 전문
⑦
밤마다 비가 오는 윤사월도 지쳤는데
깨물면 피가 나는 손마디에 물쑥이 들던
울엄마 무덤가에는 잔달래만 타는가.
저 산천 멍들도록 꽃은 피고 꽃은 져도
삼삼히 떠오르는 가슴속 상처(傷處)처럼
성황당 고개 너머엔 울어예는 뻐꾸기.
― 「봄」 전문
⑧
달은 뜨지도 않고 노여움을 더한 그 밤
포효하고 떨어진 큰 짐승 그 울부짖음 속에
눈보라 한 아름 안고 내가 왜 찾아왔나.
사나이 다문 금구(金口) 할일할(喝一喝)에 부치랴만
내던진 한 생애인데 열망이야 없을소냐
무섭고 추운 세상에 질타 같은 눈사태여.
돌에다 한을 새기듯 집도(執刀)해온 어제 날들은
아득한 그 원점에 도로 혼침(昏沈)이었구나
막대를 잡았던 손에 아픔은 남았지만.
저승도 거역하는 이 매몰 이 적요를
스스로 달래지 못해 이대로 돌아서면
설영(雪嶺)을 더터온 자국 애안(涯岸) 없이 사윌 것을.
억울해! 불료(不了)의 인생 내 물음을 내 못듣고
벌초할 하나 무덤도 남길 것이 못 되는데
사려 먼 붕도(鵬圖)를 그려 갈 길 그만 더듬는다.
― 「설산(雪山)에 와서」 전문
⑨
하늘도 없는 하늘 말문을 닫아놓고
빗돌에서 걸어나와 오늘 아침 죽은 남자
여자도 죽은 저 여자도 빗돌에서 나왔는가.
파아란 빛깔이다. 노오란 빛깔이다.
빠알간 빛깔이다. 시커먼 빛깔이다.
보석도 천 개의 보석도 놓지 못할 빛깔이다.
무수한 죽음 속에 빛깔들이 가고 있다.
삶이 따라가면 까무러치게 하는 그것,
내 잠을 빼앗고 사는 유령, 유령들이다.
― 「화두」 전문
⑥에서 ⑨까지의 작품은 연시조 형식의 선시조이다. 3장 3행의 형식이 ⑥번 작품은 세 수, ⑦번 작품은 두 수, ⑧번 작품은 다섯 수의 긴 호흡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⑨번 작품은 세 수의 정갈한 형식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에 배열되는 4음보는 2음보씩 앞 뒤로 짝을 이루어 조응하고 있다. ⑥에서 ⑨번까지의 작품 역시 위의 단시조에서 보여준 것처럼 3장 3행 형식의 연시조 형식으로서 완전한 정격 형식을 이루고 있다. 조오현의 정격 선시조에서는 완결된 형식에서 볼 수 있는 절제와 균제의 미를 강조한다. 절제의 언어는 시조의 형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절제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