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당선] 분식집 아주머니·푸줏간집 사장님 한숨소리 들으시길
[아시아엔=김기태 전 한겨레신문 기자] 분식집 아주머니의 갸름한 눈썹 사이 주름살이 깊어졌다.
아파트 단지 근처에 GS마트가 새단장을 한 탓이었다. 단지 옆 상가 1층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꽤나 큰 마트였다. 번쩍번쩍 문을 새로 연 마트에는 새로운 코너가 생겼다. 동네 분식집에서 팔던 튀김, 떡볶이, 순대가 대형마트의 진열대에 산뜻하게 배치됐다. 마트 바로 옆에서 쏠쏠히 매상을 올리던 분식집은 “그냥 죽으라”는 얘기다. 뿐만 아니다. 바로 길 건너편 형제푸줏간 사장님도 수심이 깊다. GS마트가 틈나면 ‘소 잡는 날’ 행사를 벌이는 탓이다.
대기업의 횡포가 동네 구멍가게의 밥그릇까지 건드리고 있지만 누구도 뭐라고 나서 시비 걸지는 않는다. 대기업의 갑질이 하루이틀 된 얘기는 아닐 터다. 그렇게 소상공인과 불안정 노동자들이 점점 벼랑으로 몰리는 이야기는 ‘매일 진행형’이다. 새 대통령은 여기에 주의를 기울여줬으면 좋겠다. 무너지고 있는 생산의 현장, 삶의 터전 말이다. 물론 이런 삶의 현장은 이곳 한반도에 무수히 많을 것이다. 지면 사정을 고려해 이 자리에서는 조금은 근본적인 과제 하나와, 응급한 단기과제 두가지만 얘기해보자.
먼저 근본적인 과제.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시장을 통한 소득불평등 수준은 괜찮은 편이다. 세전 소득기준으로는 공평한 나라에 속한다. 그렇지만 소득재분배, 그러니까 복지의 규모는 OECD 회원국 가운데서 가장 왜소하다. 나라가 딱히 도와주지 않아도 중하류층은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는 뜻인데, 그 배경을 보면 구멍가게 사장님들이 악착같이 일한 덕이다. 간판도 변변히 없는 떡볶이집이, 형제푸줏간이, 그리고 GS마트와 근근히 경쟁하고 있는 ‘원마트’는 GS가 아침 10시 문을 열기 전부터 일찌감치 문을 여는 것을 보면 그렇다. 불안정 노동자들의 삶도 힘겹다. 인터넷을 통해서 물건을 주문하면, 황송할 정도로 빠른 시간에 배달을 해주는, 그리고 10분이라도 배달시간이 늦어질까 봐 곡예하듯 거리를 달리는 택배노동자들의 삶이 그러하다.
일부 사람들이 장밋빛으로 그리는 ‘4차산업혁명’은 한국의 소상공인과 노동자들에게는 암담한 소식이다. ‘빅데이터’가 물류를 책임지는 대형마트와 ‘총알배송’을 약속하는 온라인 쇼핑몰은 동네 작은 가게들을 몰아낼 것이다. 그들은 또 일터에서 사람을 밀어내고 대신 기계를 착착 배치하고 있다. 나라의 복지가 부실한 한국에서 매일의 생계를 몸으로 버텨오던 영세업자들과 노동자들은 시대의 변화에 밀려 더욱 주변화할 것이다. 기계가 빠르게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시대에, 노동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강성노조 때문에 기업이 망한다”는 따위의 대선 주자의 횡설수설도 아니고, 작은 떡볶이 가게의 밥그릇마저 빼앗으려는 재벌기업의 탐욕도 아니다.
생산현장에서 빠르게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급속한 기술발전이다. 특히 복지 없이 노동만으로 호구지책을 마련해온 한국의 중하류층에게 그 변화로 인한 충격은 더욱 클 것이다. 새 대통령은 우리에게 닥친 노동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긴 호흡을 가지고 고민해줬으면 한다. 동시에 삶의 터전이 매일 무너지는 이들을 위해 기민하게 대응을 해줬으면 좋겠다.
하루 빨리 대책이 필요한 정책의제도 두가지 있다. 첫째, 산업재해의 문제다. 산업재해로 2016년에만 9만656명이 다치거나 사망했다. 이 가운데 사망자만 1777명이다. 한국의 산업재해 통계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압도적이다. 지난 2011년 우리나라 노동자 1만명 가운데 산업재해로 사망한 비율은 0.79회인데, 일본(0.20)이나 독일(0.17)보다도 확실히 많다. 산업재해 예방에 엄격한 영국(0.04회)에 견주면 20배에 이른다. OECD 국가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다. 왜 유독 한국의 노동자들은 산재의 희생자가 될까. 가장 큰 이유는 기업들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8년 40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천냉동창고 화재사건이 있었다. 사망자 가운데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 일 나온 대학생도 네명이 있었다. 기업의 책임자들은 전원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집행유예를 받았다. 이마트가 벌금으로 2000만원을 냈을 뿐이다. 산업재해로 기업이 사법처리 대상이 되는 경우는 전체 산재 건 가운데 5%에 불과하다.
기업 입장에서는 현장 안전관리에 드는 비용과 사고 이후 부담할 비용을 저울질한 뒤, 경제적인 부담이 적은 ‘합리적’인 선택을 할 확률도 높다. 이 글을 쓰는 5월 1일, 노동절에도 경남 거제시 장평동 삼성중공업에서 타워크레인의 구조물이 추락했다. 6명이 사망하고, 25명이 크게 다쳤다. 사고의 빈도로만 친다면, 이것은 사건이 아니다. 일상이다. 지난 2016년에만, 366명이 떨어지고, 102명이 끼이고, 101명이 부딪히고, 82명이 차에 치이고, 71명이 깔리거나 뒤집혀서 세상을 떠났다. 노동계, 시민단체, 그리고 일부 정치권에서 기업과 관계당국의 책임을 엄하게 묻는 ‘기업살인법’의 입법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변화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중증외상센터도 또 하나 재난의 현장이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의 추산에 의하면, 지난 2007년 기준으로 교통사고 등으로 크게 다쳐서 사망한 2만8천여명 가운데 응급의료시스템만 제대로 갖춰졌어도 살릴 수 있었던 경우가 9천건이 넘었다. 우리나라 중증외상센터의 허술함은 지난 2011년 이른바 아덴만 작전 때도 확인된 바 있다. 당시 총상을 입은 석해균 선장이 서울에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 없어서, 수원 아주대학교의 중증외상센터까지 이송됐다. 그 뒤 정부에서는 전국 9곳에 권역외상센터를 지정하는 등 제도개선을 시도한 것을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구멍은 술술 뚫려있다. 지난해 9월에도 전주에서 대형 견인차에 치인 두 살짜리 아이가 14곳의 병원을 전전하다가 사망했다. 병원이라는 하드웨어를 갖췄지만, 그 허우대를 채울 인력과 시스템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 사이에서 소중한 목숨들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있다.
새 대통령의 할 일은 많다. 무수한 과제 가운데 정책의 선순위를 정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의 생명일 걸린 문제는 정책의 가장 앞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백만 노동자, 자영업자의 삶의 터전을 허무는 거대한 변화에 대한 대책도 시급하다. 우리 주변에는 분식집 아주머니, 푸줏간집 사장님의 한숨소리가 너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