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5일] 한국 대통령 취임하는 날
2009년 방글라데시 보안군 “배고파 못 살겠다” 반란
2009년 2월25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보안군 조직인 ‘방글라데시 라이플(BDR)’ 소속 대원들이 급여 인상을 요구하며 무장반란을 일으켰다. 무장반란 과정에서 확인된 사망자는 적어도 3명이지만 현지 관리들은 사망자가 50명에 이를 수도 있다고 봤다.
이튿날인 2월26일에는 보안군 대원들의 무장반란이 확산, 다카 국경수비대 본부에서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다. 같은 날 오전 남부 테크나프에서도 반란군들이 국경수비대 초소 지휘관의 관사에 총격을 가했다. 남부 콕스 바자르와 나이콩차리, 북동부 실헤트의 국경수비대 초소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그러나 방글라데시 정부가 무장반란의 죄를 묻지 않고 고충에 관해 논의하겠다고 약속하자 항복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방글라데시에는 64개의 BDR 부대가 배치돼 있었으며 보안군 대원 수는 4만20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매월 100달러의 봉급에 쌀과 밀가루, 설탕 등을 배급받지만 당시 세계 경제위기로 식료품 가격이 오르는 만큼 봉급이 인상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어왔다고 한다.
5년마다?한국 대통령 취임하는 날
2008년 2월25일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국내외 귀빈과 일반 국민 등 5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취임식을 열고 임기 5년의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 대통령은 정부 수립 60년을 맞는 2008년을 ‘대한민국 선진화 원년’으로 규정,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의 시대로 나가자”고 촉구했다.
‘경제 살리기’와 ‘실용주의’를 앞세운 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5대 국정 방향으로 △섬기는 정부 △경제 발전과 사회 통합 △문화 창달과 과학 발전 △튼튼한 안보와 평화통일 기반 조성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서 인류공영 이바지를 제시했다.
이날 취임식에는 전직 대통령과 3부 요인을 비롯해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남바린 엥흐바야르 몽골 대통령, 훈센 캄보디아 총리,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 탕자쉬안 중국 외무담당 국무위원, 빅토르 주프코프 러시아 총리 등 외국의 주요 경축사절들이 참석했다.
1981년 2월25일 대한민국 제12대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했다. 1988년 대한민국 제13대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했다. 1993년 대한민국 제14대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했다. 1998년 대한민국 제15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했다. 2003년 대한민국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했다. 2013년 2월25일, 박근혜 18대 대통령이 취임했다.
1968년 한국 청룡부대 베트남 하미마을 학살
1968년 2월25일(그해 음력 1월) 남부 베트남 꽝남 지방의 하미마을에서 한국의 청룡부대원들이 비무장 민간인 135명을 죽여 땅에 묻었다. 베트남 사람들이 ‘하미 학살’이라고 부르는, 한국인에게는 부끄러운 역사다.
이곳에는 당시의 처참했던 학살 현장이 생생하게 적혀있는 위령비가 서있다. 베트남의 다른 지역에서 이 위령비는 종종 ‘증오비(憎惡碑)’로 불리고 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베트남 사람들에게 수차례 사과를 했지만, 그들의 원혼이 온전히 당시의 광기어린 살육을 용서할 지는 오로지 신(神)만 알 일이다. 이 비문을 읽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1968년 음력 1월 24일 학살당한 135명의 동포들을 기리다.” 꽝남성 디엔증 사 하미마을의 위령비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끄트머리쯤에 “한국인들은 다시 이곳에 찾아와 과거의 한스러운 일을 인정하고 사죄한다. 그리하여 용서의 바탕 위에 이 비석을 세웠다”고 적었다. 한국인들은 진정 사죄했는가. 그래서 용서받을 자격이 있는가.
1968년 음력 1월 24일 학살당한 135명의 동포들을 기리다.
‘역사책은 기록하기를 바다와 강이 어우러진 디엔증은 남농권의 자손들이 호안선 산맥을 넘어 남으로 남으로 땅을 열어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국가의 기억을 세웠다. 주민들은 하미에 마을을 세우고, 쟁기질을 하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고, 채소를 가꾸며 평화롭게 살았다. 하늘이 조용하고 땅이 평화로울 때까지는.
그런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천둥번개가 치며 그들이 왔다. 그들은 땅을 황폐하게 하고, 파도를 일으키고, 주민들을 전략촌에 가두고, 주민들로 하여금 마을을 버리고, 고향을 버릴 수 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칼로 창자를 끊는 아픔을 주었다. 주민들은 땅과 강과 바다를 잃고, 쟁기질을 하고 생선을 잡던 직업까지 모두 잃었다. 그 악독함을 어지 다 말하리. 머리는 땅으로 굴러 떨어지고, 피가 강처럼 흐르고, 마치 마른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지듯이 야자수 잎이 파괴되고 황폐해졌다. 눈물이 연못을 만들고, 한순간 사원이 재로 변하고, 하야(Ha Gia) 숲은 앙상한 뼈먄 남았다. 캐롱 (Khe Long)선착장에는 시체들이 쌓였다.
1968년 이른 봄, 음력 1월 26일 청룡병사들이 미친 듯이 와서 양민을 학살했다. 하미마을 30가구 중에 135명이 죽었다. 피가 이 지역을 물들이고, 모래와 뼈가 뒤엉켜 섞이고, 집들은 불타고, 불에 그을린 시신들이 얼키고 설키고, 개미들이 불탄 시신들을 갉아먹고, 피 냄새가 진동했다. 폭풍이 한바탕 몰아치고 간 그것보다 더했다.
무너진 집에서는 늙은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 신음하며 죽어갔고 아이들은 두려워 공포에 질렸다. 도망친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었고, 아기가 죽은 어머니에게 기어가서 젖을 먹었다. 더 끔찍한 것은 탱크로 무덤을 파헤친 것이다. 어둠은 이 지역을 덮었다. 풀이 시들고 뼈가 말랐다. 원혼은 잠들지 못하고 여기저기 뒹굴고, 분노는 푸른 하늘에까지 닿았다.
그러나 하늘은 암흑이었다가도 언젠가는 밝는다.
우리 고향이 다시 평안 속으로 돌아오고 행복을 일군지 25, 디엔증의 당에도 단감자가 자라고, 벼가 푸르고, 수확을 이루고, 바다와 강에는 생선과 새우도 풍부하다. 당이 길을 이끌어가고 황량한 벌판을 개척해나갔다. 과거의 전장이었던 이곳에 이제 고통은 줄어들고 있고, 한국인들은 다시 이곳에 찾아와 과거의 한스러운 일을 인정하고 사죄한다. 그리하여 용서의 바탕 위에 이 비석을 세웠다.
우리는 인도적인 인의로 고향의 발전과 협력을 열어갈 것이다.
이 모래사장과 포플러 나무들이 양민학살을 기억할 것이다.
당지구 정권과 디엔증 주민들이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