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6일] 아시안의 귀한 벗 김수환, 롤리타안, 윤동주 잠든 날
2009년 아시안의 귀한 벗 김수환, 롤리타안, 윤동주 잠든 날
2009년 2월16일 저녁 6시12분 서울 강남 성모병원에서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선종했다. 향년 87세. 노환으로 기력이 쇠약해지면서 병원에 입원한 지 7개월 만이다. 김 추기경은 이날 오후부터 급격히 호흡 곤란이 심해지고 혈압이 떨어지면서 의식을 잃었고, 산소 호흡기 등 응급조치도 통하지 않았다. 임종을 지킨 사람들은 “고맙다”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밝혔다.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정신적 지주. 1922년 5월 대구에서 출생한 고인은 1951년 사제품을 받았고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을 거쳐 1968년 대주교로 승품한 뒤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를 한국인 최초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 등을 역임한 뒤 1998년 정년(75세)을 넘기면서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다.
김 추기경이 선종한 날 오전 (현지시각) 한국의 ‘애국가’를 작곡한 고(故) 안익태 선생 부인 롤리타 안(安)여사도 스페인 마요르카 섬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스페인 출신인 고인은 1946년 마요르카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부임한 안 선생과 결혼했고, 1965년 선생이 59세를 일기로 작고한 뒤에도 한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2005년 한국을 방문, ‘애국가’의 저작권을 한국 정부에 무상으로 기증했다. 2006년엔 안 선생이 사용하던 피아노·지휘봉 등 150점의 유품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날로부터 64년 전인 2월16일 또 한명의 소중한 아시안의 벗이 영면에 들었다.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윤동주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전보에는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고 적혀 있었다. 항일운동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이었다. 그때 나이 28세였다.
중국 땅에서 태어나 서울의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자화상’ ‘서시’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등이 연희전문 재학 때 쓴 시들이다. 군국주의 열풍이 일본 열도를 뒤덮자 한 학기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옮겼다가 이듬해 7월 체포됐다. 1968년에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2005년 교토의정서 발효
2005년 2월16일 온실가스 감축에 관한 최초의 구속력 있는 국제협약인 교토의정서가 발효됐다. 이산화탄소·메탄 등 온실가스의 대기 중 농도를 낮춰 기후변화라는 재앙을 저지하려는 전 지구적 대응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55%를 차지하는 141개 국가가 교토의정서를 비준하면서 2012년까지 온실가스를 평균 5.2% 감축하겠다고 선언했다.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돼 감축 의무가 없는 한국도 2002년 비준했다.
그러나 교토의정서의 야심찬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온실가스 주요 배출국의 참여도가 턱없이 낮았다. 세계 3대 배출국인 미국과 중국, 인도가 나란히 불참한 것이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조지 W 부시 당시 미 대통령은 의정서에 결함이 많다며 끝내 비준을 거부했다.
기후학자들은 “지구 온도의 상승폭을 금세기 말까지 섭씨 2도 이하로 제한하려면 온실가스 감축량이 적어도 60%는 돼야 한다”고 주장, 교토의정서의 한계를 지적했다.
주요 배출국의 불참, 실효성 없는 감축 목표 등으로 제 구실을 하지 못하던 교토의정서는 2009년 12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15)’에서 시효 연장 등이 검토됐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18년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
1918년 2월16일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선언했다. 13세기 중엽에 민다우가스가 리투아니아의 여러 부족을 통일시켰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공작 신분으로 통일 리투아니아를 통치했으며 이들 가운데 게디미나스가 14∼16세기에 동유럽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국으로 확장시켰다. 리투아니아를 지배하던 대공작은 1386년 폴란드도 지배하게 돼 이 두 나라는 400년 동안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됐다.
그뒤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가에서 실제적으로 종속적 위치에 있다가 폴란드의 제3차 분할(1795) 때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됐다. 1864∼1905년에 있었던 집요한 러시아화 운동에 굴복하기도 했으나 20세기 초 들어 리투아니아 민족주의 정신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독일이 지배하던 1918년 스스로 독립을 선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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