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60]노무현 시대 계파는 ‘보스’ 아닌 ‘네트워크’ 중심

2016-03-18 10;15;26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노무현 정권의 계파정치를 종합해 보자. 사실상 당대 5년의 국내정치와 이후 이명박 정권의 그것을 연계하는 18대 국회까지 포함하자면 기왕의 ‘계파’ 이미지와 그에 뒤따르는 부정적 편견은 크게 퇴조한다. 앞서 지적한대로 돈과 권력의 흐름에 따른 일방적 ‘쏠림’은 의원 각자의 치밀한 고려와 정치적 환경변화에 따른 합리적 선택 등으로 이념과 소신의 자발적 경로를 통해 유화(宥和)’의 길로 접어든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추종의 ‘예(禮)’ 역시 예전의 맹목성이나 보은의 문화구조 보다 더 자기중심적이거나 조건부 논리 안에서 견고히 지탱한다. 그리고 과거보다 분명히 간헐적이고 제한적으로 이루어진 인적 이동과 배반 행각 역시 ‘당선’과 정치적 ‘안정’이란 분명한 타깃을 의식하며 진행된다.

그러나 17대 국회의 근본적 변화는 기왕의 계파를 관리하던 주군(主君)형 의원들의 종속관계가 인적 네트워크로 흡수?통합, 과거 보스들의 위엄이 실적과 정책개발 등 효율적 리더십 행사로 대체된다. 중심역할을 담당하는 의원들의 계파장악력이 창조적 변용과 건설적 파괴력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 모두가 밑줄을 긋게 된다. 이제 막후 영향력만으로는 정치적 감동과 실질적 추종을 장담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노무현과 그의 측근들은 이 같은 변화가 자신들의 주도적 업적이라며 치부하지만 그것이 과연 새로운 정권의 의도적 정치공학의 결과였는지, 아니면 거부할 길 없는 시대의 도도한 흐름이었는지는 유권자 각자에게 달리 투영될 일이다. 중요한 것은 직업정치현장에서 보스의 과거 콘셉트가 소멸하고 여야의 대결이미지도 제한적으로 용해?극복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념과 성, 직업별로 수평적 유대나 연대가 도모되기도 한다.

<조선일보>는 2004년 8월 28일자 신문에서 17대 의원 집단에서 이 같은 변화가 크게 여섯 부문의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졌고 이를 주도한 핵심 의원이 12명(與 7: 野 5)이라고 압축한다. 인물별?네트워크별 준거에 따라 이를 체계화한 것이 표다. 386운동권은 정당을 초월하여 이슈별로 관심과 실천코드를 맞춰나가고 있었고 1960년대 운동권 출신인 6?3 세대는 어느덧 당의 중진으로 숙성?편입하여 원활한 정치과정과 그 소통을 책임져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른바 ‘긴조(緊急措置의 약칭)’ 세대는 여권핵심을 장악, 노 정권의 주도세력으로 나라의 명운을 도맡아야 할 형국이었다.

게다가 여성 의원군은 강한 연대와 파워집단으로 전진 배치되고 있었고 학자그룹은 경제전문가 중심으로 당시 야권의 정책브레인들로 기능하고 있었다. 나머지 또 다른 네트워크를 결정할 한 축으로 관료출신그룹은 경제?행정?법률 등 과거 활동한 영역의 경험 인프라를 바탕으로 뭉치고 있었다. 여야 가리지 않고 그같은 소통과 통합의 정치적 동기란 다름 아닌 (재)집권에 있었고 이를 수식 ? 강화할 명분으로 자신의 귀속공간이 수권정당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대실패와 노무현을 향한 대중적 지지하락은 어쩔 수 없이 한나라당이 챙겨야 할 반사이익으로 숙성된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어느 한 쪽이 지나치게 잘 하거나 월등하였기에 확보한 ‘우위’가 아니라 성공과 번영의 기회를 눈부시게 살리지 못한 다른 한 쪽의 과오가 반성조차 할 줄 모르는 같은 편 오만과 화학반응한 ‘의도치 않은’ 정치적 선물이었다. 10년을 표류하다 다시 정권을 챙기게 된 한나라당에게 그것은 반가운 압박이자 부담스런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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