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7일] 여성 대통령과 인연 깊은 날짜

2010년, 2000년 2월7일은 여성 대통령 탄생하는 날?

2010년 2월7일 코스타리카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 국민해방당(PLN)의 여성 후보 라우라 친치야(당시 50세) 후보가 압승했다. 코스타리카 사상 첫 여성 대통령, 중남미에서는 다섯번째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친치야 후보는 47%를 득표, 경쟁 후보인 시민행동당의 오톤 솔리스를 22%포인트 차로 앞서 당선을 확정지었다. 2위 솔리스는 25%, 3위 오토 게바라(자유운동당)는 21% 득표에 그쳤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오스카르 아리아스 현 대통령이 친치야 후보를 지지했다.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과 중국과의 통상 재개 등 자유시장 경제정책 등 아리아스 대통령의 경제노선을 계속 이어갈 방침을 밝혔다. 중도성향의 친치야 후보는 아리아스 정부에서 부통령과 법무장관 등을 역임했다. 10대 아들을 두고 있는 친치야는 미국 조지타운 대학을 졸업했고, 낙태와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등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 성향을 갖고 있다.

2월7일은 여성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날짜인 것 같다. 친치야 대통령 당선일로부터 꼭 10년 전인 200년 2월7일 핀란드에서도 여성대통령이 탄생했기 때문.

핀란드는 이날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 사민당 출신으로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타르야 할로넨(Halonen, Tarja)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역시 핀란드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었다.할로넨은 이날 선거에서 중도당의 에스코 아호 전 총리를 누르고 임기 6년의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됐다. 핀란드에서는 직전 대선(1994년)때도 여성 국방장관이 대통령에 도전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정통 사회민주주의자. 동성애자협회 회장을 맡기도 하는 등 사회 소수세력들의 권리를 적극 옹호해 온 할로넨은 1979년 국회의원 당선 뒤 법무-보건-외무장관 등을 역임했다.

핀란드는 세계 최초로 여성의 공직 진출권을 인정한 나라다. 할로넨 대통령 당선 당시인 2000년에도 여성 국회의원수가 스웨덴, 덴마크에 이어 세계 3위였다.

2009년 사망자 100명 넘은 호주 사상 최악의 산불

2009년 2월7일 호주 남동부 빅토리아주(州)에서는 산불이 났다. 폭우·폭염·가뭄이 한꺼번에 겹친 자연재해로 비상이던 당시에 설상가상으로 산불이 나자 호주 국민들은 망연자실 했다.

무슨 산불이 사람을 100명 넘게 죽이는 지, 말 그대로 악몽과 같은 재해였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사람들이 불길을 피해 차량으로 이동하다 미처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변을 당했다. 방화 가능성도 제기되기도 했다.

호주 역사상 산불피해에 따른 사망자 기록은 1983년 75명이었는데, 이를 경신했다. 산불의 원인은 재앙적인 수준의 가뭄이었다. 산불 발생 지역은 사고 당시 한낮 기온이 46도까지 치솟는 등 폭염이 이어지면서 극심한 가뭄 피해를 보고 있었다.

한편 호주 남동부 지역 산불과 대조적으로 호주 북부에선 폭우로 인한 홍수 피해를 겪었다.

1999년 후세인 요르단 국왕 사망

1999년 2월7일 오전 11시43분 요르단을 46년간 통치해 온 후세인 이븐 탈랄(Husayn Ibn Talal) 국왕이 63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화약고’ 중동의 한 복판에 있던 요르단을 46년간 통치해오면서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평화를 이끌어 온 거인이 영면하는 순간이었다.

1953년 17세에 왕위에 오른 후세인은 냉전과 40년에 걸친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 요르단의 발전을 일궈낸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튿날인 8일 열린 영결식에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옐친 러시아대통령, 한국의 김종필 총리,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등 세계 40여 개 나라 정상들이 찾아와 조문했다.

집권 중 최대 시련은 1967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6일전쟁’ 때. 요르단은 이 전쟁에서 이집트 편을 들었는데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참패했다. 그 여파로 요르단은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을 잃게 된다.

후세인은 그러나 1998년의 중동평화협상에서 ‘평화의 중재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당시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후세인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 후세인은 아픈 몸을 이끌고 중재에 나서 와이리버 협정을 성사시켰다.

1986년 필리핀 17년 만에 대통령선거

1986년 2월7일 필리핀의 미래를 결정할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마르코스(Marcos, Ferdinand, 1917~1989) 당시 대통령은 대규모 반정부운동과 좌익세력의 공격, 미 국무성의 압력 등으로 마지못해 받아들인 선거였다. 하지만 투표부터 개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민간 선거감시기구와의 개표결과는 큰 차이가 있었고 예상대로 마르코스는 재선됐다.

분노한 민중을 이끌고 필리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사람은 아키노(Aquino, Corazon)였다. 보름동안 시위가 이어졌고, 같은 달 22일에 사태가 반전됐다. 마르코스의 측근이었던 엔리레 국방장관과 라모스 참모총장대행이 마르코스에 반기를 든 것. 가톨릭의 신추기경도 반정부입장을 표명했다. 대다수가 카톨릭 신자인 필리핀에서 추기경의 반(反)마르코스 입장 표명은 돌이킬 수없는 정치적 반전을 몰아왔다. 아키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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