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코오롱 이동찬 명예회장 1주기, 그의 발자취 되돌아보다

고 이동찬 회장

고 이동찬 회장 <사진=뉴시스>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8일은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1주기다. 지난해 이날 타계한 이동찬 명예회장에 대해 당시 신문들은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그를 기렸다.

“韓 섬유산업 산증인, 은퇴후엔 화가로”

“韓 섬유산업 대부…창업 1.5세대”

“스포츠맨, 화가…만능 예능인”

“요란하지 않았던 재벌총수”

“전국민 포근히 감싸준 ‘섬유업 代父’ 떠나다”

“한국 섬유산업의 개척자”

“14년 동안 경총 회장 맡아”

“검소한 씀씀이로 유명…각계 조문 이어져”

당시 <한겨레>와 <매일경제>에 실린 추모글을 다시 찾아 읽었다. 큰 별을 기리는 것은 그의 자취를 잇고 그의 꿈을 확대 확산시키는 것이 최선의 길이 아닌가 싶다. -편집자

 

“슬리퍼 하나 오십년 신으며…섬유산업 기초 일궈”

[가신이의 발자취]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영전에?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이동찬 회장님은 큰 재벌 기업의 회장이었지만 슬리퍼 하나를 오십년간이나 신었고 코트 하나를 10년간 입으실 만큼 철저히 검소하고 절제했습니다. 대신 그는 헐벗은 국민을 입히는 데 자신을 바치고 가난한 나라를 풍요롭게 만들어 보려고 일생을 바쳤습니다.

우리나라가 오늘날 수출대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섬유제품 수출은 핵심적인 디딤돌이었으며, 고인은 그 섬유산업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대한민국 최초로 나일론을 생산해 의복문화와 생활방식을 혁신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지금보다 더 가난한 나라로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고인은 모두가 사양하는 경총회장 자리를 14년간, 부회장직을 8년간이나 맡아 ‘노사불이’의 원칙을 강조하고 산업평화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치 권력이나 명예에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기업 경영에만 전념했습니다.

당신이 없었더라면 올림픽의 꽃이라는 마라톤 경기에서 황영조, 이봉주 선수가 금메달을 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국의 국위선양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농구와 골프의 발전에도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제가 한 때 골프 반대운동을 펴다 당신께 불려가서 호되게 질책을 받기도 했지만 제가 펼쳤던 공명선거운동은 적극 후원해주었습니다. 초등학교 먼 후배에게 보여주신 자상한 관심을 저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기업인이었으나 풍요로운 세상보다는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은퇴한 뒤에는 ‘우정 선행상’을 제정해 “선행이 잊어지지 않도록,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의 선행을 모래가 아닌 바위에 새기고 싶다”고 했습니다. 착함과 더불어 우정은 아름다움도 추구했습니다. 그림 그리기에 심취해서 세 번이나 전시회를 열었고 그 수준은 전문화가에 못지 않았습니다.

우정 이동찬 회장님! 정말 보람 있고 멋지게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감사하고 흠모합니다.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 저도 선물로 받은 그 그림 복도에 잘 걸어두고 매일 아침 쳐다보며 선배님을 기억하겠습니다.

故이동찬 코오롱 회장을 기리며

???????????????? ????????????????????????????????????????????????????????????????? ?김영배 경총 부회장

직언을 서슴지 않는 재계의 수장, 한국 섬유산업의 산증인, 국내 기업인 중 가장 솔직한 인물, 정직과 원칙의 경영인, 재계·체육계·문화계를 아우르는 팔방미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수사로 회장님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경영계를 이끌어 오신 회장님의 모습이 먼저 떠오릅니다. 1987년 6·29 선언은 우리나라 노사 관계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 사건이었습니다. 노조는 봄에 타결한 임금 협상이 무효라며 재협상을 요구했고, 그해에 3700건이 넘는 노사 분규가 발생했습니다. 경영자를 감금·폭행하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회장님께서는 14년간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을 맡으셔 최일선에서 노조의 거센 요구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시장경제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셨습니다. 1989년에는 경제단체협의회를 설립해 ‘산업평화’를 위한 재계의 단결된 뜻을 모으려고 힘쓰셨고, 때로는 정부나 노조에 대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회장님을 처음 뵌 건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30대 초반에 경총 조사부장으로 재입사했던 1987년 초였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남들이 안 가본 길은 보람이 될 수 있다 하시면서 경총으로 잘 돌아왔다고 환대해주셨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범인으로선 실천하기 힘들 만큼의 자기 절제와 근검 정신으로 무장된 분이셨습니다. 오죽하면 1992년 출간된 회장님의 자서전 제목 “벌기보다 쓰기가, 죽기보다 살기가”였겠습니까? 산을 올라가는 열정만큼이나 산을 내려가는 순리가 필요하다 하시며, 욕심을 버리고 순응하는 데서 삶의 가치를 찾을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회장님은 그렇게 일군 기업과 재산을 소유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기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공기업”이라 하셨습니다. 회장님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 올 4월 22일 개최된 ‘제14회 우정선행상’ 시상식이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지금 나라가 무척 어지럽습니다. 나라 경제를 받쳐왔던 제조업의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김 박사, 그건 이렇게 생각하면 되지’라며 혜안을 주실 것만 같습니다. 회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회장님 말씀을 받들어 모든 기업들이 보람의 일터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제는 무거운 세속의 짐을 벗어던지시고 편안히 잠드소서. 평소 주신 말씀 평생 제 인생의 사표로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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