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국민성우 배한성 “유머러스한 사람이 제일 부럽다”
[아시아엔=인터뷰 이상기 기자, 정리 김아람 인턴기자] 올해 칠순을 맞는 배한성씨는 대한민국 최고의 ‘노력형 인간’이다. 배씨는 “더빙을 할 외국영화배우의 영혼을 느껴야 그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최근 OBS방송은 ‘명불허전’ 출연을 앞둔 그에 대해 ‘열정을 담은 천의 목소리’의 주인공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방송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6년 TBC 동양방송 2기 성우로 데뷔했으니 올해 만 40년차가 된다.
배한성 성우는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연습하고 외화더빙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실명위기에 처할 만큼 수도 없이 외화를 보고 또 봤다. 오늘의 배한성을 만든 것은 바로 ‘연습’이다. <아시아엔>은 ‘연습의 달인’ 배한성을 인터뷰했다.
올 3월부터 지구촌사랑의쌀문화예술단을 맡고 있다. 5월30일엔 국회에서 ‘자선음악회 밥心콘서트’를 열었는데,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나?
“어려서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사실 최종학력이 서라벌예대지만 졸업도 제대로 못했다. 초중고교 모두 돈이 없어 학업을 계속 할 수 없었는데 그때마다 친구나 은사님 같은 분들이 나타나서 도와주셨다. 가난으로 굶주리는 사람을 외면한다면 그건 배은망덕이나 다름없다.”
배씨는 유독 사회봉사단체의 홍보대사나 친선대사 등을 많이 맡고 있다. 유달리 고생으로 점철된 청소년 시절에 고마운 분들에 대한 보답을 위해서라고 했다. 생명나눔, 에쎄가든, 한국실명예방재단, 산업안전 홍보대사 등이 바로 그것이다. 배씨는 2012년 아시아기자협회가 주관한 ‘내마음의 스승’ 행사에서 멘토로 인연을 맺은 프라카스(서울대 의대 박사과정)가 고국 네팔에 일시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고,?인터뷰 직후 50만원을 보탰다.
라디오 연속극, TV 외화 시리즈, TV 프로그램 사회자 등으로 많은 인기를 끌고 팬도 많다. 1985년 KBS 최우수 남자 성우상, 2010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 표창 2011년 MBC 방송연예대상 라디오부문 공로상 등을 받았더라.
“내겐 상이 목표가 아니다. 열심히 하다보니 상도 받고 이름도 어느 정도 얻었다.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것, 그게 내 목표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절대 없다. 실제로 1969년 TBC 성우공채에 합격하기 전, 나는 탤런트가 되고 싶었지만 수도 없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수많은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목소리를 연기하는 직업, 바로 성우가 될 수 있었다. 180대1의 경쟁을 뚫고 단 한번에 합격했다. 그리고는 한눈 안 팔고 성우의 길에 매진했다.”
성우뿐 아니라 DJ, MC, 강사, 칼럼니스트, 교수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비결은 뭐라 생각하나?
“변화하는 시대에 스스로가 변하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우 본연의 직무에서 벗어난 적은 거의 없다고 자부한다. 언젠가 TV 예능프로에 두어 번 출연했더니 후배들이 전화해 그러더라. ‘선배, 맘에 없는 프로그램 출연해 망가지지 말고 후진들 교육시키시라’고. 당장 TV예능프로 출연을 중단했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배 선생님은 대표적인 연습벌레로 불린다. 또 젊고 어린 사람들한테도 배우는 자세가 돋보인다고 하던데.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 했다. 모르는 걸 물어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다. 책과 신문을 읽고 말이다. 오래 일을 하는 것은 오랜 공부를 통해서 가능하다.”
사람들은 말로 소통을 한다. 참 어려운 일인데 배 선생님의 경우 어떻게 하시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달라.
“성우로서 배우들 목소리를 더빙하면서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그 배우를 분석하는 것이다. 입모양만 보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려면 그 사람을 분석해야 한다. 그래야 그 분의 영혼이랄까 그런 것에 닿을 수 있다. 나는 누군가 말할 때 보지 않고 들으면서 그가 말하는 것을 그림으로 그려본다. 그가 말하는 걸 분석하다 보면 저절로 그림처럼 나타난다. 나는 누구를 판단할 때 말을 10여 차례 해본다. 학력이나 성격, 사회적인 것 등을 80% 정도는 맞더라. 말하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한 걸 들었다. 가령 ‘으음’ ‘아, 그게’ ‘에 또’ 같은 말은 가능하면 사용하지 말라고 하시던데.
“맞다, 그런 말들은 사족 같아서 내 말을 상대에게 전달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군더더기 없는 말이 의사소통에 중요하다. 나도 고친 지 얼마 안됐다. 느 날 후배와 통화한 게 녹음되어 들어봤더니. ‘어 그래 아 그래? 아 그래 여섯 시? 그래 알았어~ 그럼 거기로 가면 되지?’ 이랬더라. 충격 받았다. 군말을 많이 하면 지저분해진다.”
처음 인사할 때 인상적인 말은 어떻게 하면 될까?
“대부분 첫 인사 때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는데 ‘반갑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말소리만 그렇게 나온 거다. 정말 반가워하면서 ‘반갑습니다’ 그래야 진심이 느껴진다. 까탈스러운 것 같지만 그래야 진짜 인사가 되는 것이다.”
말을 잘 한다는 건 어떤 뜻인가?
“말을 많이 한다고 절대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말이 많으면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절대 아니다. CEO과정 공부할 때 일이다. 젊은 친구 5명이 회장 선거에 나왔다. 적당히 야망도 있고 리더십도 보이더라. 그런데 나와서 포부를 말하는데 몸을 꼼지락거리거나 ‘제가 자격이 없습니다만’ 이렇게들 얘기하더라. 그건 겸손이 아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나오는데 대머리였다. 그런데, 그 친구 말이 ‘제가 완전 대머립니다. 제 별명 여러분이 짐작하신 대로 빛나리입니다. 제가 이 모임을 빛내도록 하겠습니다’ 하더라. 누가 됐을까? 몇 마디 안 했지만 빛나리 한마디 하고 들어간 친구가 당선됐다.”
참 재밌는 사례다. 비슷한 경우 또 없나?
“그래미상 시상식 때 일이다. 수상자 헨리 포드가 말했다. ‘제가 준비한 소감은 두가집니다. 긴 것과 짧은 것. 저는 오늘 두 가지 중 하나만 말씀 드리려는데 어떤 게 좋으시겠습까’ 하니까 ‘짧은 것으로 해달라’는 주문이 나왔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큐!’ 그러니까 사람들이 막 웃었다. 헨리 포드가 다시 말했다. ‘여러분이 웃으시는 걸 보니 시간이 좀 있으신가 보군요? 그럼 긴 것도 말하겠습니다. 땡큐 베리 마치!’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어떤 말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좋은 사례다.”
말할 때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것들이 많을 텐데 몇가지 더 들려달라.
“징징거리면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오는 복도 달아난다. 말하는 스타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저희 집안 어른 가운데 102세를 넘기고 4년전엔가 돌아가신 분이 있다. 102세면 장수신데, 너무 힘겹게 사시다 가셨다. 그것도 요양시설에서. 내가 조카라서 명절 때 꼭 찾아뵀다. 그런데 그분 말씀이 ‘1년에 2번 밖에 안 오느냐, 코빼기도 안 비추냐고’ 하셨다. 당신 자녀가 6명인데. 다 따님이라 이민 가고 그랬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들 말씀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이 내 칭찬을 나중에 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런 조카가 어디 있냐고. 자식도 안 찾아오는 사람을 찾아온다’며. 그분은 엄청난 재산가셨는데, 왜 말년을 힘들게 사셨는지 생각해봤다. 그분의 말투 때문에 그렇다고 확신한다. 내가 찾아뵐 때 왜 자주 안 오느냐고 나무라시지 않고 ‘네가 나를 돌봐주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덕분에 산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으셨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한다. 빠삐용 영화가 있었다. 빠삐용은 모든지 진취적인데. 친구인 드가는 매사 부정적이고 불만투성이었다. 더스틴 호프만이 배역으로 나온 그 친구는 탈출도 못하고 평생을 섬에서 갇혀 사는 신세가 된 건 당연한 귀결 아닐까? 외국에서도 잘 안 되는 사람의 특징은 ‘징징 대면서’ 운다.”
목소리가 독특하다. 목소리도 소통에 중요하다고 보는지.
“쉰 목소리는 안 좋다. 목소리가 안 좋으면 클리닉 가는 것도 방법이다. 클리닉에서 훈련하면 바꿀 수 있다. 권해드리고 싶다. 물론 그렇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MB도 탁하고 쇳소리 나는 목소리였다. 쇳소리 나는 거 아주 안 좋은데, 대통령도 했으니까. 하지만 목소리가 중요한 건 분명하다.”
참 재밌는 사례다. 비슷한 경우 또 없나?
“말투도 중요하다. 어떤 분이 강의를 마친 내게 ‘아주 목소리는 좋네요’ 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다. ‘칭찬 감사한데 한글자만 바꾸면 더 좋으실 텐데요’ 했더니 ‘왜 그러세요? 이 양반 웃기시네. 내가 뭘 잘못했어요?’ 하더라. 내가 그랬다. ‘선생님 하신 말씀 가운데, 배한성씨는 말도 참 잘하는데 목소리도 좋아요 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랬더니 얼굴을 붉히며 사라지더라. 그분이 목소리 ‘는’ 좋아요가 아니라 목소리 ‘도’ 좋아요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한 글자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다. 말투도 무척 중요하다.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분은 유머 잘 하는 사람이다. 유머 때문에 사람들은 행복해 한다. 레이건 대통령이 총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얘기다. 레이건이 수술 후 ‘총알이 조금만 비켰더라면 큰 일 날 뻔했는데’ 했더니 의사들이 ‘오늘은 우리 모두가 공화당원입니다’라고 응수했다. 얼마나 멋진 유머인가?”
긴 시간 고맙다. 더 한마디 해주실 말씀 있으면 해달라.
“역시 유머와 겸손이 소통에는 최고의 약이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사람들 생각도 바꿔준다. 하나만 더 얘기하자면,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 가서 봉사하고 이제 휴가를 내서 귀국했을 때 일이다. 기자들이 1등석 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밀며 우왕좌왕했다. 그때 슈바이처 박사가 3등석에 내리는 게 아닌가. 기자들이 물었다. ‘왜 3등칸에서 내리십니까?’ 박사 왈 ‘이 기차는 4등석이 없더군요’ 얼마나 인문학적인 대답인가. 인간미가 없으면 나올 말이 아니다. 말 한마디가 역사에 남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