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불교와 부처에 대한 진실과 오해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법구경> 183 게송에 보면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라는 글이 나온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는 뜻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요 도리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긴 어렵다. 이 쉬운 불교를 팔만대장경을 다 설해도 모자란다.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부처님이다. 아니 이 우주만유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까지도 모두가 부처다. 그런데 사람들은 절에만 가야 부처님이 계시고 스님이 계시는 줄 안다. 그리고 떡과 과일,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108배나 3000배를 올려야 불공을 드리는 줄 잘못 알고 있다.
부처님과 법당을 착각하지 말자. 우리 집이 바로 법당이고 내 가족이 바로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가장 가까운 데에 있다. 내가 부처님이다. 내가 부처이기 때문에 내 곁의 사람이 모두 부처다. 우리 아버지가 부처님이요, 우리 어머니가 부처님이다. 내 남편이 부처님이요, 내 아내가 부처님이다. 내 아들 딸이 부처님이다. 우리 동지들이 바로 모두 부처다.
불교는 살아나는 것을 배우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죽는 것을 배우는 종교다. ‘내’가 죽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다. 세상이 온통 ‘나’ 때문에 싸움이 벌어진다. 여기에 ‘내’가 죽어버리고, 우리라고 하는 ‘큰 나’가 살아나야 한다. 작은 나인 소아(小我)가 죽으면서 우리 가족이라고 하는 보다 큰 ‘나’가 살아나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조그마한 ‘나’에 얽혀있는 욕심 때문에 큰 것을 다 죽여 버린다. 큰 것을 살리고 작은 것을 죽이는 것이 불교이지만 욕심을 충족시키고 이 작은 ‘나’를 붙들기 위해 큰 것들을 전부 다 죽여 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한한 과보(果報)를 만들고 한없는 복을 털어버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부처가 무엇인가? 빛깔도 모양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것이 부처다. 불교가 무엇인가? 빛깔도 모양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이것을 주춧돌로 삼는 것이 불교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을 ‘나’의 주춧돌로 삼고 있다. 빛깔과 모양과 소리와 냄새를 ‘나’의 주춧돌로 삼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계산이 빗나가 버린 것이다.
이 ‘나’를 죽이고, 빛깔도 모양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것을 주춧돌로 삼아 계산을 하면 그 세계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아무 것도 없으므로 모순이 붙을 자리가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부처님의 세계를 벗어나면 전부가 모순이다.
불교에는 일체의 모든 법의 이치를 그 성질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삼성’(三性)이라는 교리가 있다.
첫째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다. 이리저리 나름대로 헤아리고 억측을 부려 집착하는 성질이다. 범부의 어리석고 허망한 소견으로 일체의 사물에 대해 실체가 있는 것처럼 잘못하는 착각이다.
둘째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다. 다른 인연에 의하여 생긴 만유(萬有)를 말한다.
셋째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현상의 본체를 일컫는 것으로 원만, 성취, 진실한 진여(眞如)를 말한다. 곧 원만한 진리인 ‘원성실성’이 다른 것을 의지하면서 생기는 모습이 의타기성이요, 이 의타기성을 착각해서 잘못 풀이하는 것이 변계소집성이다. 다시 말해 빛깔도 모양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것이 원성실성의 원점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인연의 힘으로 생긴 의타기성인데도 자꾸만 이 의타기성의 ‘나’를 원점으로 삼을 때 변계소집성이 되는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짚이라고 하는 원점이 인연의 힘에 의해 이루러진 것이 새끼줄이다. 이 새끼줄을 언뜻 잘못 보고 ‘앗! 뱀이다’라는 생각을 한다. 이것이 변계소집이다. 그런데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과 새끼줄을 보고 뱀이라고 하는 것은 똑같은 변계소집의 현상이다. 새끼줄을 보고서 “저것은 새끼요. 원점은 짚이야” 이렇게 이해하면 탈이 없다.
그런데 새끼줄을 보고 “앗, 뱀이다”라고 할 때부터는 계산이 전부 빗나간다. “뱀한테 물리면 큰일 난다. 저걸 어떻게 해야 되고 이걸 어떻게 해야 되고…”이렇게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고 나름대로 계산을 전개시키면 원점과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이 몸을 ‘나’라고 할 때 계산은 모두 빗나간다.
그러므로 이 몸을 절대 ‘나’라고 붙들지 말아야 한다. 이 몸은 인연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인연임을 정확하게 보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이 몸을 ‘나’라고 하는 것은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하는 것과 똑같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불교다. 불교라고 하는 것은 “나를 죽이면서 주위의 모든 것을 순하게 풀어가라”는 가르침이다.
불교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이 부처가 아니다. 모두가 부처이고, 일마다 불공이다. 이를 일러 우리는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