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1호 기업인 전철우의 꿈 “고향랭면 성공시킨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IMG_5762 보장된 미래 포기하고 끝없는 도전 ‘후회 없어’

[아시아엔=인터뷰 이상기·사진 라훌 아이자즈·정리 최정아 기자] 1989년 동구권 붕괴 당시 동독 유학중 북한 대신 일찌감치 한국행을 선택한 전철우(46)씨는 늘 웃는 낯이다. 방송출연과 대중 강연 등으로 꽤나 알려진 그는 요즘 잘나가는 요식업 사업가로 꼽힌다. ‘전철우 고향랭면’을 한국에 퍼뜨린 그는 “사업 잘 하는 것 밖에 다른 곳엔 별 관심이 없다”고 했다. <아시아엔>은 서울 양재동 ‘전철우 음식사랑’에서 전씨를 인터뷰했다.

식당 이름에 ‘고향’을 붙인 이유가 있나?

“내 고향이 평남 남포다. 고향의 음식을 만들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지었다.”

본인이 지었나?

“그렇다. 그때는 고향생각 많이 났고, 고향 계신 부모님께서 해주신 음식이 떠올랐다. 방송 한창 할 때 SBS에서 코미디를 했는데 프로 하나 하면 하루종일 걸린다. 그때 최양락, 이봉원, 김미화씨가 내가 만든 랭면(그는 북에서는 두음법칙이 없다며 ‘랭면’이라고 했다)을 맛보더니 랭면 식당 하면 대박 나겠다고 하더라. 이봉원씨에게 이름을 뭘로 할까 했더니 아이디어 좋은 전유성씨한테 의논하라더라. 전유성씨가 며칠 뒤 전화해 ‘철우와 랭면이 어떠냐’고 했다. 그래서 전철우 랭면이 탄생한 거다.”

면을 택한 이유는?

“북한에선 랭면, 만두, 순대가 맛있는데 랭면을 가장 좋아한다. 순대는 아바이순대고. 한국에선 6·25 전에는 랭면이 흔치 않았다고 하더라. 6·25 이후 북한실향민들이 랭면을 보급했다고 들었다. 함흥랭면과 평양랭면이 양대산맥이다. 매일 한끼는 랭면을 먹을 정도로 워낙 좋아하기도 했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 실제로 구분해서 먹나?

“평안도 사람들도 실은 함흥랭면을 좋아한다. 평양랭면은 매니아들이 좋아하고, 함흥은 누구나 좋아한다. 식당하면서 처음에는 함흥랭면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고향이 평안도이면서 평양랭면 안하냐고 하더라. 그래서 평양랭면을 시작했다. 평안도 분들은 와서 평양랭면 먹고, 남쪽분과 함경도 분들은 매콤 달콤한 함흥랭면을 많이 드신다. 나는 개인적으로 평양랭면을 좋아하는데 아내는 함흥랭면을 좋아하더라.”

냉면에도 등급을 매기나? 미슐랭 같은 것.

“우리는 대중적인 음식 즉 모든 사람이 좋아할 수 있는 음식을 판다. 매장 한두 개 정도만 하면 매니아를 위한 음식을 할 텐데, 프렌차이즈는 대중적인 음식을 해야 한다.”

<사진=전철우의 음식사랑>

 

식당 성공비결은 뭐라고 보나?

“맛과 가격이 중요하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해도 맛 없으면 금방 망한다. 유명하면 처음엔 호기심에 오지만 두번째는 안 온다. 부모님이 하는 음식점도 맛 없으면 안가는 게 사람들 심리다.”

냉면 맛은 어떻게 내는가?

“끊임없이 먹으러 다니며 맛을 보고 연구를 한다. 맛을 볼 줄 아는 게 중요하다. 세대에 따라 맛에 대한 취향도 자꾸 바뀐다. 이 트렌드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연세가 있는 분들은 자기 관점에서 평가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시장을 봐야 된다. 중년 남성들은 치즈 이런 거 안 좋아하고 소주 안주 될 것만 생각한다.”

트렌드를 잘 읽어야 성공한다는 얘기인가?

“당연하다. 주인이 좋아하는 음식만 만들면 대중음식점이 아니다. 샐러리맨이 많은 곳에서는 탕같은 게 잘 되지만, 대학가에선 덮밥을 좋아한다. 어떤 이들은 나이 들면 탕을 좋아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모르는 거다. 예전에는 음식점이 지저분해도 찾았지만 요즘은 어림없다. 깨끗하고 입맛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 배고픈 시절에는 양 많고 싸면 좋아했지만, 요즘은 좀 비싸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골라먹는 시대가 온 것이다. 또 한가지, 데이트 가면 여자들이 선택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창업하는 사람들에게 선배로서 특별히 하고 싶은 얘기는?

“개인이 창업하면 70~80%는 망하고 프렌차이즈 창업을 하면 20~30% 정도 실패한다. 그래서 안전하게 하려면 프렌차이즈를 하라고 권한다. 시스템을 잡아놓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망하는 건 시장에 대해 모르니깐 그렇다. ‘친구들이 와서 도와줄 거야’ 이런 식으로 안이하게 생각하다 문 닫는 거다. 나도 많이 망해봤지만, 하나를 하더라도 정말 집중해서 이것저것 고려하면서 해야 한다. 개인창업은 절대 쉽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음식점을 개업할 경우 한달 이상 장사 안 되면 문 닫아야 한다. 아주 특출나게 잘 하는 게 없으면 시작부터 지는 거다.”

식당입구에 ‘인건비 줄여서 음식값을 줄인다’고 써있는데.

“우리 식당 종업원들은 다른 곳보다 많이 준다. 대신 인원을 적게 쓴다. 홀 서비스를 안 하니 가능하다. 손님들이 셀프로 하셔야 한다. 맥도날드가 돈 번 이유가 주방에만 사람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것을 잘 읽는 편이다. 고객들이 뭘 좋아하는지. 회사원들 보면 점심 6천원이상이면 정말 힘들다. 이런 것을 긁어줘야 되겠다 싶어 그런 컨셉으로 하다 보니 좀 잘 되는 것 같다.”

전철우 냉면을 먹으면서 가장 기분 좋은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먹으면 그게 가장 기분 좋다. 단골이 많아지면 그게 최고다.”

남한으로 넘어올 당시의 얘기를 해보자. 베를린 장벽 무너질 때 동독 유학중이었다. 당시 상황 기억나는 대로 말해달라.

“한국 올 때 걱정 많이 했다. 좋은 차들이 많다는 정도 외에 생각보다 잘 산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당시 동독 GDP가 한국의 2배였다. 1년 정도 지나면서 생각보다 다른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더라. 살기 힘들지만 자유롭게 발전하는 거구나, 이런 생각이 갈수록 들었다.”

북한에 20년 정도 살다가 유학 간 셈인데, 유학은 어땠나?

“어렸을 때는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똑같지 않나. 직장생활 오래 했으면 모르겠는데, 젊을 때니깐 적응을 금방했다. 동독에서 적응할 때는 다소 힘들었지만 그때 적응하는 법을 배우니깐 오히려 한국에선 금방 적응했다.”

당신 고향 남포는 꽤 번성했던 도시로 알고 있다.

“평양이 특별시고, 남포와 개성은 직할시다. 북한에선 꽤 번창했다. 항구가 있어서 대사관 사람들이 주말마다 수영하러 왔다. 평양에서 차로 40분 거리다. 외국사람들이 비키니만 입고 거닐던 모습을 보러 우르르 몰려가곤 했다. 북에서 어림없는 옷차림이었으니깐.”

<국경의 남쪽> 같은 북한을 주제로 한 영화도 종종 보나? 그리고 실제 사실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나?

“종종 본다. <간첩 리철진> 같은 영화 참 재밌더라. 실제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 옛날에는 영화 제작진이 자문도 구하고 그랬다. 요즘은 바빠서 좀 못한다. <태극기 휘날리며>에 출연요청도 있었는데…. 그때 친했던 감독들이 지금은 제작자가 된 사람도 있다. 그분들이 남북간의 이해를 좁히는데 제일 기여한 분들이다.”

한국에 온 뒤 북한이나 외국에 자주 다니나?

“물론 북한은 못 갔고 중국은 일 때문에 워낙 많이 갔다.”

서울 양재동 전철우 음식사랑에서 진행된 전철우 대표 인터뷰. 전철우 음식사랑은 소비자들에 냉면 외에도 저렴하고 맛 좋은 음식들을 제공한다.
서울 양재동 전철우 음식사랑에서 진행된 전철우 대표 인터뷰. 전철우 음식사랑은 소비자들에 냉면 외에도 저렴하고 맛 좋은 음식들을 제공한다.

외식업으로 성공했는데, 다른 계획은 없나?

“물론 앞으로도 계속 음식이다. 해외에 진출하면 좋겠고, 우리 프랜차이즈로 창업한 사람들이 돈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게 내 꿈이다.”

어려서 잘 하던 거, 꿈 같은 게 뭐였는지 궁금하다.

“글 쓰는 거 좋아했다. 영화쪽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영화쪽 사람들과 교류도 많이 했다. 하고 싶었지만 그건 워낙 배고픈 직업이라, 먹고 살아야 하니깐 할 수 없었다.”

특별한 취미는?

“이것저것 많이 한다. 예전에는 책 읽고 여행하고 그랬는데. 요즘엔 취미로 식품개발쪽으로 바꿨다. 새로운 음식점을 많이 가는데 갔던 식당은 잘 안 간다. 맛있는 곳을 그래서 많이 아는 편이다. 먹는 게 취미가 됐다. 해외 출장 가서 가족들과 해외 음식 먹어 보고. 이게 일이지만 한편 재밌다.”

그동안 책도 몇 권 썼는데 앞으로 책을 쓴다면?

“장사하는 법을 적나라하게, 독자가 읽기에 아주 기분 나쁘게 쓸 거다. 강의 가서도 직설적으로 하는데 그러면 청중들 눈이 아주 반짝반짝거린다.”

대인관계에서 피드백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귀찮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도 다급하니 내게 전화했을 거다. 정 시간이 안 되면 ‘죄송하다. 다음 기회에 날 잡아보자’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기다려 준다. 내 시간이 중요한 만큼 그 사람 시간도 중요하지 않은가? 나는 약속을 무척 중하게 생각한다. 독일사람들은 4시에 만나자 하고 4시까지 기다리다 안 오면 사정없이 가버리더라. 나는 방송할 때도 1시간 먼저 도착한다. 우리 직원들 보니 30분 지각하는 사람은 없더라. 5분 지각한다. 5분만 일찍 도착하면 될 걸 그 5분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는 사람이 많더라.”

좌우명은?

“이 순간순간 열심히 즐겁게 살자. 일에 치우치다 보면 내가 이건 아닌데, 일도 잘 살려고 하는 건데. 자꾸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이렇게 살라고 하는 건 아닌데. 편하게 살려고 하는 건데. 순간순간 이런 생각 많이 하게 돼서 그게 좌우명처럼 됐다.”

이런 질문 미안한데, 만약 전철우 대표가 사망한다면 뉴스 헤드라인이 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나.

“식품을 하니깐 한국식품산업에 한 획을 그은 사람! 그거였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에게 성공한 외식사업을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이 있는가 넌지시 물었다. 그는 “전혀! 난 굉장히 쿨하다. 자기 하고 싶은 거 해야지, 자기 살 길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즉각 답했다. 그가 북한에서의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남한으로 건너온 것처럼 자식도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길 바라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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