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7일] 자오쯔양 중국 전 총서기 사망(2005년)

2010년?中, 세번째 ‘베이더우’ 위성발사 성공

중국은 2010년 1월17일 쓰촨성 시창위성발사센터에서 ‘베이더우’ 시스템의 세번째 위성을 창청 3호 로켓에 실어 쏘아올렸다. 독자적 위성항법시스템 구축을 위한 세번째 위성 발사로, 지구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

당시 중국 정부는 새로 개설한 베이더우(beidou.gov.cn) 사이트를 통해, 2020년까지 5기의 정지궤도위성과 30기의 비정지궤도 위성을 쏘아올려 전세계를 포괄하는 중국의 독자적 위성항법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발표는 허언이 아니었다.

중국은 구랍 27일 베이더우를 통해 위치와 시간정보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본격적인 시험 가동에 들어갔다.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독자적인 GPS 시스템을 갖게 된 갓이다.

2012년말부터 1단계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관할하는 정식 운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를 위해 올해 안에 추가로 6개의 위성을 쏘아 올릴 계획이며 오는 2020년쯤에는 전 세계를 상대로 GPS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은 이를 통해 GPS관련 산업은 물론 지구상에 있는 목표물을 정확하게 독자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게 돼 국방 분야의 작전 효율이 크게 높아질 전망이다.

2005년 자오쯔양 중국 전 총서기 사망

▲ 자오쯔양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텐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시위학생들과 대화하고 있다.

중국 정치 개혁의 상징 자오쯔양(趙紫陽)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2005년 1월17일 숨을 거뒀다. 향년 86세. 1989년 톈안먼 사태를 강제 진압하는데 반대하다 권좌에서 밀려난 이후 16년 동안 가택연금생활을 해온 정치가인 자오 전 총서기의 사망원인은 오랫동안 앓아온 호흡기와 심혈관계 질환의 급작스런 악화로 알려졌다.

자오쯔양은 공산당 총서기 직을 맡고 있던 1989년 발생한 톈안먼 사태의 강제 진압을 반대했다. 당시 톈안먼광장에서 단식 농성을 하던 시위 학생들을 찾아 눈물을 글썽였던 자오쯔양의 모습은 개혁파 지도자로서 많은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 광경을 지켜본 당시 실권자 덩 샤오핑은 분노했다. 자오쯔양은 결국 “당을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총서기직에서 밀려나게 됐고, 이후 베이징 도심인 왕푸징 부근에 있는 자택에서 연금 생활을 해왔다.


1994~1995 미일에 꼭 1년새 엄청난 지진

1994년 1월17일 오전 4시31분(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리히터 규모 6.6의 강진이 발생해 5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LA 지역엔 1992년 6월 28일에도 진도 7.5의 강진으로 1명이 숨지고 9000만 달러의 재산피해를 내는 등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여러 차례 있었다. 지진 발생 2주 후까지도 최고 진도 5.0을 비롯한 3차례의 강력한 여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LA를 가로지르는 30여 개의 고속도로 중 11개가 파손돼 극심한 교통 혼잡이 빚어졌다. 간접피해까지 감안한 피해 추정 규모는 150억~300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꼭 1년 뒤인 1995년 1월17일 오전 5시46분에는 일본 효고 현(兵庫縣)을 중심으로 한 긴키(近畿) 지방에 규모 7.2의 강진이 발생했다. 진원지는 고베(神戶)에서 남쪽으로 20km 떨어진 아와지 섬(淡路島)으로, 진앙이 지표로부터 불과 20km밖에 되지 않아 큰 피해를 남겼다.

이 지진으로 6000여 명이 사망했으며 3만여 명이 부상 당했다. 30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고베 항이 폐쇄됐다. 건물 20만여 채가 붕괴됐고, 상당한 길의의 철로가 망가졌다. 재산피해는 9조 6000억 엔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역사상 가장 피해가 큰 자연재해로 기록됐다.

마르코스와 무바라크, 엘바라데이와 아퀴노?

1981년 1월17일 필리핀의 마르코스 당시 대통령은 9년 간의 계엄령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마르코스는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1981년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필리핀 내 모든 정치적 권위와 힘을 사유화했다.

필리핀 민중들은 그의 독재에 맞서 비폭력주의 노선의 민중항쟁을 일으켰다. 그가 취임 때 지녔던 정치적 정당성은 파도의 포말처럼 부서졌다는 것이 당시 필리핀 국민들의 생각이었다. 당시 필리핀의 정치적 상황은 불안, 아노미, 정치에 대한 경멸과 무관심, 반달리즘(vandalism), 개인적·집단적 폭력의 지속적 증가 등으로 나타났다.

마르코스의 최대 정적이었던 베니그노 아퀴노는 1980년 마르코스에게 “필리핀을 동남아시아에서 다음의 분쟁 발화점으로 만들어버릴 끔찍한 폭풍이 운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마르코스는 아퀴노의 존재에 대해 항상 어떤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고 1983년 아퀴노를 암살한다. 야권지도자 암살사건은 필리핀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몰고 왔다. 마르코스가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하와이로 망명해 독재자로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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