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6일] 유독 의인과 현자가 많이 돌아가신 날
2011년 ‘남부 수단’ 독립
2011년 1월16일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로 내전 중이던 수단에서 남부 수단의 독립을 결정할 주민투표가 마무리됐다. 2월15일 공표된 이번 주민투표 결과 유권자의 60% 이상이 투표에 참여해 과반수가 찬성, 남부 수단은 같은 해 7월 세계 193번째 독립국이 됐다.
수단 내전은 영국 제국주의가 원흉이다. 수단 북부 지역은 역사적으로 이집트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이 주로 거주하는 반면 남부 지역은 기독교와 민속신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다수 거주했다. 수단을 식민지로 삼은 영국은 두 지역에 별도 행정기구를 둬 통치, 차이를 심화시켰다. 심지어 1924년부터는 말라리아의 확산을 막는다며 북위 10도 이북에 사는 사람은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8도 이남에 사는 사람은 북쪽으로 갈 수 없게까지 했다. 또 남쪽 지역에 이슬람교 포교를 차단하고 기독교를 전파했다.
영국이 뿌린 분쟁의 씨는 수단 독립 1년 전인 1955년에 내전으로 발화했다. 1972년까지 지속했던 내전은 세계교회협의회의 중재로 남부 수단에 자치를 주기로 하고 끝났다. 하지만 북부의 집권세력이 남부마저 이슬람화하겠다며 1983년 성전을 선포, 내전이 재개됐다. 이 내전은 20년 넘게 지속되며 2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고, 400만 명이상이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2005년 평화협정으로 간신히 종결됐고, 평화협정에 따라 투표가 진행된 것이다.
2006~BC 289년 의인과 현자가 많이 돌아가신 날
역사책을 뒤적여 보니, 1월16일에는 의인(義人)과 현자(賢者)들이 많이 돌아가셨다.
2006년 1월16일 오후 중국 하얼빈 시의 중앙대로 금안 오로바 광장 공원. 사단 법인 안중근의사 숭모회가 안중근 의사(義士)의 동상을 세우는 제막식이 조용히 거행됐다.
안 의사 동상은 오른 주먹을 불끈 쥔 채 당당히 걸어가는 모습이다. 높이 4.5mㆍ기단 2m 크기에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97년 전인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 오로바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하얼빈 역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러나 이런 의거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제국주의적 한반도 침탈은 35년 이후에도 계속됐다.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1월16일 일제에 맞서 싸웠던 시인 이원록(李源錄)이 중국 베이징의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안타깝게 눈을 감았다. 40세였다. 퇴계의 14대손인 그의 본명은 원록(源錄), 아명은 원삼(源三)이다.
그가 본명 대신?‘이육사’로 자신을 표기한?것은 1930년부터.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1년 7개월 간 옥살이를 할 때 그의 수인번호가 264였다. 그 번호를 발음대로 적은 이름이 이육사다. 처음에는 ‘죽일 육(戮) 역사 사(史)’, 혹은 ‘고기 육(肉) 설사할 사(瀉)’ 자를 썼다. 식민지의 젊음이 느꼈을 역사에 대한 절망, 자조가 그대로 드러난다.
‘대륙 육(陸) 역사 사(史)’ 자를 쓴 것은 1932년 그가 의열단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1기생으로 입학할 때부터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일제의 감옥을 17번 드나들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절정’ 전문).
?1929년 1월16일에는 “양양한 압록강수는 밤낮으로 흘러가는곳 어디메뇨 유유한 나의심사 너를 따라 거지 없다”는 시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애사(愛史) 편강렬 선생이 사망했다.
일제의 고문으로 병마에 시달리며 죽음에 직면하고도 독립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담아낸 시다. “죽어도 왜놈에게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며 감옥에서 병보석으로 풀려 나온 후에도 시설 좋은 일본병원을 거부했다. 편강렬 선생은 경북의 의병 이강년 휘하에서 16세의 어린나이로 선봉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황해도와 영남지방에서 신민회, 대한광복회를 통해 국권회복운동했고,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황해도에서 군사주비단을 조직, 독립군 국내진입 때 원조를 도모하다가 일본군에 적발돼 옥고를 치렀다. 1923년 만주에서 의성단을 조직, 중국 장춘성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해 60여명을 사살하는 등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하얼빈을 방문하다 1924년 8월 일경에 체포돼 신의주 감옥으로 이송됐다. 한국 정부는 19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584년 1월16일에는 투병 중이던 율곡 이이 선생이 49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10만 양병설’을 무시한 조선은 지금으로부터 428년 전 일본에게 짓밟힌다. 그 해도 임진년(壬辰年)이었다. 당시 조선의 총 병력 수는 장부상으로는 30만 명이 넘었으나, 실제 전투 가능한 병력 숫자는 1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밖에 기원전 289년 1월16일 중국 전국 시대의 철인으로 일컬어지는 사상가 맹자가 세상을 떠났다. 맹자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착하다.
1991년 연합군, 이라크에 공중폭격 개시
1991년 1월 16일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이 이라크에 공중폭격을 시작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와 국경선 확정 문제를 놓고 수차례에 다퉜다. 특히 페르시아 만 어귀에 위치한 와르바와 부비얀 섬은 페르시아만(灣) 지역의 세력 균형을 변경시킨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페르시아 만 연안지역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라크의 주목을 받게 됐다.
1990년 8월2일 사담 후세인은 이들 분쟁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무역금지 조치 등 제재를 통해 이라크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군은 사우디아라비아에 군대를 파병했다. 후세인은 안보리 철수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고, 1991년 1월16일부터 공중폭격을 받게 된다.
1982 한국-쿠웨이트 항공협정 발효
1982년 1월16일 한국과 쿠웨이트 사이에 항공협정을 발효했다. 1967년 1월16일에는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민간항공협정을 체결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