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브로모 화산 ‘우윳빛 일출’에 젖어
원시와 문명 공존하는 인도네시아를 가다
여행, 어쩌면 지독한 중독인지도 모르겠다. 매년 한 달씩 다녔던 배낭여행지가 올해는 인도네시아였다. 25일 동안 수마트라 섬과 자바 섬, 발리 섬을 돌았다. 그동안 몰랐던 인도네시아의 속살을 맛본 느낌이다. 책을 읽어도 흡수되지 않았던 다양한 문화가 숨쉬고 있었다. 옛 사람들이 ‘독만권서(讀萬卷書), 불여행만리로(不如行萬里路)’라 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수마트라 섬 부끼띵기(Bukit tinggi)는 베트남 단랏같은 고산지대 휴양지다. 부끼띵기에서 3박4일 머무는 동안 ‘인도네시아의 그랜드캐년’이라는 시아녹 계곡과 마닌자우 호수를 돌아봤다. 굽이굽이 48개 급커브를 돌아 가는 길이 아슬아슬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한가지 횡재. 세상에서 가장 큰 꽃 라플레시아(rafflesia)가 피었다는 것이다. 전날 비가 내려 질척이는 산을 기어올랐다. 꽃 보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라플레시아는 3년에 한번, 주로 7월에 일주일 간 피는데, 30시간 정도만 꽃잎을 벌린다고 한다. 그런데 날씨가 따뜻해 1월에 꽃잎을 벌리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꽃을 보니 경이에 찬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4위 커피 생산국이다. 그 중 75% 이상이 수마트라산이다. 다양한 종류의 값비싼 커피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루악커피를 부끼띵기에서 맛보았다. 수마트라산 루악커피는 커피열매를 먹은 사향고양이 똥으로 만든 것인데, 서울 청담동 커피숍에서 한 잔에 5만 원 받는다. 빠당으로 가는 도중 식당에 들렀다. 상에 놓인 음식 중 원하는 것을 골라서 먹고 접시 수를 세어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고기류, 생선류, 튀김류 등 갖가지 요리를 차려 놓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달려드는 파리떼 처리방법이 필요해 보였다. 빠당 요리는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인기가 좋아 여행지마다 전문코너가 있다.
빠당에서 가루다항공을 타고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섬에 도착했다. 수마트라 섬 사람들은 다혈질 한국인을 닮았고, 자바 섬 사람들은 일본인을 닮아 조용하다고 한다. 그곳에서 만난 한인교포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족자카르타는 문화유산이 많은 곳이다. 공화국 설립 이전 자바 수도로서 왕궁과 전통복장 바틱, 다양한 공연들을 볼 수 있다. 보로부두르(Borobudur) 불교사원 앞에 서면 입이 딱 벌어진다. 웅대하다. 같은 모양의 스투파 수백 개가 탑돌이 하듯 둥글게 서 있다. 사원에 올라 본 새벽 풍경은 인간 세상 같지가 않다. 바닷속처럼 고요하다. 내가 살아온 삶, 살아갈 삶에 대해 솔직하게 대면하게 하는 힘이 있다. 세계 3대 불교유적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을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감동받는 곳이다. 보로부두르 일출은 필름처럼 머릿속에 저장됐다.
나를 대면케 하는 힘
인도네시아에 산재한 130여 개 활화산 중 ‘신의 산’이라 불리는 해발 2392m 브로모(Bromo) 화산에 가기 위해 족자카르타에서 승합차에 올랐다. 오토바이와 거대한 유조차가 뒤섞인 도로 운전은 아슬아슬했다. 그렇게 13시간 동안 공포의 질주를 한 끝에 해발 1700m 고지 숙소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었다. 고산지대라 턱이 덜덜 떨릴 만큼 추웠다. 숙소는 4시간마다 품어내는 화산 습기로 눅눅하고 천장에는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습기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쾌적한 집을 두고 떠나와 고생하는 이유가 뭘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면 견디기 힘든 밤이었다. 이튿날 새벽 4시 일출을 보기 위해 4륜구동 자동차에 올랐다. 전망대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해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20분쯤 기다렸을까. 붉게 솟아오른 태양이 화산의 열기를 우윳빛 강으로 바꿔 놓았다. 세상에 이처럼 경이로운 일출이 또 있을까. 크고 작은 화산들은 온통 강으로 둘러싸인 한 폭의 수채화였다. 이토록 눈부신 일출을 볼 수 있다면 더 지독한 고생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여유가 생겼다. 해가 산등성이 위에 올라선 뒤 화산재가 사막처럼 펼쳐진 분화구에 올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푸석이는 짙은 암회색 화산재가 온몸을 공격했다. 마스크와 선글라스가 왜 필수라 했는지 알 만했다. 금방 손에 잡힐 듯한 화산은 생각보다 멀었다. 249개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야 거대한 분화구에 이른다.
브로모 화산은 분화구 안에 ‘불의 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활화산이다. 2011년에도 폭발해 인도네시아 열도를 긴장시킨 곳이다. 용암이 끓고 있는 분화구에서 연기를 내뿜는 장관을 빨려들 듯 지켜봤다. 한 발만 삐끗하면 저 아래 끓는 용암 속으로 떨어질 수 있는 공간이었다. 화산재가 사막을 이룬 해발 2000m 고지에도 삶은 존재한다. 브로모 화산 주변 사람들은 화산이 언제 다시 폭발해 생명을 거둬갈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급경사지를 가꿔 파를 심고 양배추를 경작하면서 산다.
세계 유일의 유황광산 카와이젠(Kawah Ijen)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매일 죽음의 유황 냄새를 맡으면서 80㎏ 유황을 어깨에 메고 해발 2000m 고지에서 4㎞를 내려온다. 그리고 한국돈으로 6000원을 받아 생계를 유지한다. 새벽 4시에 올라가서 본 카와이젠의 황금빛 유황광산, 그 메케한 연기 속에 비춰진 녹색 칼데라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속에 화산보다 더 뜨겁게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광산에서 유황을 건져 어깨에 메고 미끄러운 길을 오르던 사람들과 마주쳤다. 짐 없이 몸만 오가기도 힘든 길에 무거운 유황을 메고 매일 2차례 오르내린다니.
최근 시나붕 화산 폭발이 뉴스를 장식했듯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화산분화가 가장 많은 나라다. 또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공존한다. 대부분 이슬람교가 주류지만 발리는 다르다. 발리를 왜 ‘신들의 섬’이라 부르는지 도착하는 순간 알게 된다. 힌두교를 믿는 발리는 집집마다 거리마다 신을 모시는 신전이 호화롭게 장식돼 있다. 하루 세 번 꽃과 음식을 바치는 제를 지내는 모습을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안녕을 기원하며 바치는 신성한 제물이 대부분 원숭이와 고양이 밥이 되고 거리의 볼썽사나운 쓰레기가 되어 뒹구는 것은 아이러니다.
인도네시아는 자카르타, 발리 등 대도시 빼고는 신호등과 횡단보도가 없다. 거리엔 마차와 오토바이, 자동차가 뒤섞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사람들은 한없이 친절하다. 바쁠 것 하나 없이 여유로운 국민성은 생활수준과 상관없이 평화롭게 비친다. 발리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부타를 만났다. 아들 넷을 둔 그는 한국에서 2년간 공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때 배운 한국말을 곧잘 했다. 한국 자동차, 스마트폰 최고라고 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뭔가 얻기보다 오히려 비우고 돌아왔다. 다 누리며 살지 못한다는 불평을 두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