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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온돌방’ 조향미 “메주 뜨는 냄새 쿰쿰하고”

    할머니는 겨울이면 무를 썰어 말리셨다 해 좋을 땐 마당에 마루에 소쿠리 가득 궂은 날엔 방 안 가득 무 향내가 났다 우리도 따순 데를 골라 호박씨를 늘어놓았다 실겅엔 주렁주렁 메주 뜨는 냄새 쿰쿰하고 윗목에선 콩나물이 쑥쑥 자라고 아랫목 술독엔 향기로운 술이 익어가고 있었다 설을 앞두고 어머니는 조청에 버무린 쌀 콩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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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찐빵’ 장재선 “어머니 없이 참 오랜 세월을 혼자 버텨왔구나”

    집 근처 시장에 찐빵 가게가 생긴 것을 안 후로 가끔 들른다. 고향에서 살던 그 때, 어머니는 찐빵을 즐겨 만들었다. 뜨거운 김이 나는 찐빵을 논일하는 어른들에게 갖다 줄 때마다 나도 배불리 얻어먹었다. 내 얼굴이 찐빵 같다며 어른들은 몰랑몰랑하게 웃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른들은 찐빵 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내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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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기침 소리’ 박노해

    찬 겨울 아침   어흠, 어른의 기침 소리 마당 위 얇은 싸락눈이 한번 날리고 갓 깨어난 참새들 대숲으로 난다 물동이를 머리에 인 누나가 발자국 소리 죽이고 숙취 어린 눈동자들 흠칫 옷깃을 매만진다 어흠, 이른 아침 어른의 기침 소리 정신 차려 자세를 가다듬는 맑고 차운 시대정신의 기침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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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난 부탁했다’ 류시화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신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신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신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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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序 그 여자 앞에 무너져내리다’ 박노해

    그 해 첫눈이 펑펑 내리던 밤 엉금엉금 기어가는 마지막 호송차는 만원이었지요 그 바람에 규정을 어기고 나는 그 여자 옆에 앉혀지게 되었습니다 눈송이 날리는 창 밖만을 하염없이 내다보던 그 여자는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검은 눈이 어느덧 젖어 있었습니다 자기는 아이 둘 가진 노동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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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소한’ 장정혜 “남은 숙제가 있다면”

    소한 추위가 창문 아래서 떨고 있다 양력 일월 오일이네 어느해 그다지 춥지않던 오늘 결혼식을 했었지 그 날부터 가볍지 않은 삶이 시작되었어 아주 먼 길이었어 까마득하게 생을 마감한 꽃들이 떨어지고 낭만의 가을 단풍이 낙엽되어 뒹굴어 절망으로 닥아오면서 내가 내가 아니었음이 서러웠어 먼 길 걸어오면서 이제 어둠이 내리기 전에 남은 숙제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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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첫마음’ 정채봉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이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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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1월1일에’? 이채경 “지난해와 달라진 게 없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흰 서리 내린 겨울 창문으로 성큼 새해가 와 있습니다. 나는 가슴이 덜컹합니다. 추위를 이기려 차를 끓이면서 이대로 다시 잠이 들면 그만큼 새해가 늦게 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지난해와 달라진 게 없는데 그냥 새해가 와 버리면 어쩌나요. 하지만 어제의 짐을 지고는 오늘의 삶을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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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가득한 한심’ 박노해 “양지바른 무덤가에 누워”

    오늘은 한심하게 지냈다 일도 하지 않고 책도 읽지 않고 마루에 걸터앉아 우두커니 솔개가 나는 먼 산을 바라보고 봉숭아 곁에 쪼그려 앉아 토옥토옥 꽃씨가 터져 굴러가는 걸 지켜보고 가을 하늘에 흰 구름이 지나가는 걸 바라보고 가늘어지는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이고 소꿉장난하는 아이들과 남편 배역을 맡아 하다가 목이 말라 우물가에서 심심한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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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시] ‘살아서 돌아온 자’ 박노해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진실은 사과나무와 같아 진실이 무르익는 시간이 있다 눈보라와 불볕과 폭풍우를 다 뚫고 나온 강인한 진실만이 향기로운 사과알로 붉게 빛나니 그러니 다 맞아라 눈을 뜨고 견뎌내라 고독하게 강인해라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음해와 비난은 한 철이다 절정에 달한 악은 실체를 드러낸다 그대 아는가 세상의 모든 거짓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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