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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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 칼럼] 멀리서 찾아온 친구

    노년의 한가로운 시간은 이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재산이다. 나는 그 노년의 여백을 즐거움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공부하는 즐거움이 있고 글을 쓰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멀리서 찾아오는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얼마 전 오후 나는 묵호항 부두에서 울릉도에서 오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배에는 멀리 호주에서 온 벗이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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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 변호사의 ‘정보기관을 위한 변론’

    1979년 12월, 수도군단 사령부에서 근무하던 시절 군사반란이 있었다. 44년 전 일이다. 반란군인 공수부대가 군단사령부 작전 지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걸 묵인하면 반란에 동조한 것이 되고 막으면 교전상태에 돌입하는 순간이었다. 사령관은 자리에 없었다. 초급장교로 반란군이냐, 정부군이냐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우리 부대는 반란군이 됐다. 예하 사단의 연대가 여의도의 방송국을 점령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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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의 촌철] ‘무소불위’ 안기부에 검찰도 법원도 무력했던 5공시절

    홍준표 대구시장은 어린 시절 순경이 아버지를 막 대하는 걸 보고 검사를 꿈꾸었다고 했다. 우리 또래가 소년 시절 흔히 보던 광경이었다. 까까머리 중학생 때 나는 빈민촌인 상계동에 살고 있는 작은아버지 집에 가서 묵었다. 바라크 창고 같은 집이었다. 판자로 된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방 하나와 바깥 흙바닥에 아궁이가 있었다. 마치 포로수용소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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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 칼럼] ‘권력형 검사’와 ‘인권변호사’

    36년전 조영래·신기남·이원영 변호사를 추억하다 1987년 2월 5일 아침 10시경이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으면서 서소문 거리는 질척거렸다. 도로변에는 먼지 섞인 눈 덩어리들이 천덕구러기가 되어 뒹굴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어둡고 우중충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젊은 변호사들의 사무실이 들어있는 빌딩이었다. 입구에 붙은 아크릴 안내판에 입주해 있는 변호사들 이름이 붙어 있었다. 4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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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⑤] 국가에 목숨 맡기고 음지에서 싸우는 ‘전사’

    정보요원 훈련 중에 작은 사고가 있었다. 몇몇 요원이 외출을 나갔다가 카페에서 건달들과 시비가 붙은 것이다. 요원들은 그런 경우 기가 죽어서도, 져서도 안 됐다. 조직의 자존심이다. 신분 노출은 철저히 금지됐다. 그런 문제를 처리하는 조직내의 파트에서 경찰의 관여를 금지시키고 격투를 벌인 요원들을 데려왔다. 외부적으로 조직원을 철저히 보호해도 내부적으로는 달랐다. 그날 밤이었다.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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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④] 여성요원들 투지와 집착도 대단했다

    그 며칠 후 나는 정예 요원들이 훈련 중인 코스에 중간에 합류하게 됐다. 세상에서 갑자기 첩보영화 안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 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봉쇄된 넓은 왕릉지역이었다. 작은 언덕 같은 왕릉이 있고 그 아래 사당이 있었다. 그 주변은 손질이 잘 된 넓은 잔디밭이 펼쳐졌고 크고 작은 연못이 보였다. 양지쪽의 연못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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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③] “조직적이고 방향성과 이념적 지향이 있는 듯했다”

    나는 군부대 같은 곳 앞에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회색의 높은 담이 보였다. 중간쯤에 대형 철문이 있고 그 앞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번들거리는 가죽졈퍼에 감색 헬멧과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M16으로 무장한 특수부대원 같은 존재들이 서있었다.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옆에서 한 남자가 나를 안내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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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②] 안기부 면접관과 마주하다

    나는 36년 전 봄날의 하루가 적힌 일기장을 보고 있다. 나는 종로5가 뒷골목 낡은 빌딩의 한 사무실에서 안전기획부의 인사담당 요원을 만나고 있었다. 푸른 와이셔츠에 감색 넥타이를 맨 세련된 옷차림의 남자였다. 무테안경을 쓴 하얀 얼굴에서 엘리트의 기운이 풍겼다. 그가 말했다. “그동안 살아온 자서전을 써주시면 조직 내의 다른 파트로 넘기겠습니다. 그러면 그 부서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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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 칼럼] 내 믿음은 위선일까?

    얼마 전 본 댓글 두 개가 마음에 남았다. 그중 하나는 내 글이 신학적 이론의 틀에 나의 경험과 생각을 끼워 넣고 그 안에서만 움직인다고 하면서 너무 평면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 자신도 신뢰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초인적으로 보이려는 가장적 모습이거나 내면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오만함을 드러내려 한다는 지적이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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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의 정보기관 변론①] 음지에서 벌어지는 전쟁

    1987년 냉기 서린 바람이 부는 봄이었다. 점심시간 나는 서소문 뒷골목의 작은 스시집에서 안전기획부 요원인 대학 선배를 만나고 있었다. 그의 변신을 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법과대학 1학년 시절이었다. 머리에 띠를 묶은 그가 수업중이던 강의실 문을 박차고 나타났다. 그는 우리들에게 박정희 독재와 정보정치를 종식시키기 위한 시위에 동참하자고 열변을 토해냈다. 교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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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 칼럼] 편안히 죽을 권리

    내가 지내고 있는 실버타운의 식당에서 앞에 앉아 있던 노인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아내가 암에 걸렸을 때 받아두었던 수면제를 한 병 모아뒀어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을 때 그걸 먹으면 되겠죠?” 그건 농담이 아니었다. 사랑하던 아내를 떠나보내고 고독감에 어쩔 줄 모르는 말이었다. 그가 덧붙였다. “이웃 방의 영감은 남몰래 로프를 준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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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의 촌철] 그는 영화나 드라마의 괴물 같은 국정원장이 아니었다

    38년 전쯤이다. 30대 초반이던 내가 사는 아파트 옆집에 40대 중반의 남자가 살고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둥글둥글하게 생긴 아저씨였다. 그 집의 열린 창문에서는 때때로 찬송가 연주가 작게 흘러나오곤 했다. 이웃집 남자는 내가 다니는 교회의 구역장이었다. 한번은 그가 우리 아파트로 건너와서 예배를 인도했다. 기도가 끝난 후 다과를 나누며 이런저런 얘기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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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의 촌철] 학교폭력의 추억

    “나 4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어.” 고교동창이다. 이름과 소년시절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얘기를 하거나 같이 놀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는 나에 대한 기억이 명확한 것 같았다. “너하고 나하고 같은 밴드반이었어. 네가 나갈 무렵 내가 들어갔지. 너는 밴드반을 나갈 때 대걸레 자루로 스무대를 맞고 나갔다고 하면서 나도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때리더라구. 여덟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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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상익의 촌철] 무역회사 사장 출신 경비원의 ‘잔잔한 미소’

    아버지는 30년 넘게 회사를 다니다 퇴직했다. 그 다음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평생 기계같이 회사로 갔는데 안 가니까 이상하다고 했다. 그 생활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 같다. 그 얼마 후 아버지는 내게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게 안 되면 길거리에서 만두를 만들어 팔아보겠다고 했다. 정년퇴직은 인생의 경사진 언덕 아래로 굴러내리는 것이었다. 아들인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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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MS정명석의 기억⑦] 잘못 빠져든 보통 신도들까지 매도해선 곤란

    정의 독점하고 분노로 JMS집단 재단하선 문제 못 풀어 넷플릭스에서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30년간 컬트집단과 싸워온 한 대학교수의 집념에 의해 그 내막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는 현대판 영웅인지도 모른다. 나는 변호사로서 20년전쯤 그 집단의 교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었다. 대한민국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 교주를 신이라고 하든 오래된 당산나무를 신으로 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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