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수십 년 뒤에야 보인 풍경…최인훈의 ‘광장’과 거제도의 기억

최인훈 작 <광장>

“기억나는 소설이 있습니까?” 인도, ‘광장’, 그리고 거제도

부산 유엔평화기념관을 둘러보다가 인도 전시관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해설사는 인도의 의료지원과 포로송환 활동을 설명하더니 갑자기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기억나는 소설이 있습니까?” 뜻밖의 질문이었다.

나는 거의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최인훈의 <광장>입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바로 그 소설의 역사적 배경입니다.” 순간 인도는 더 이상 한국전쟁에 참전한 스물두 나라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았던 인간의 선택을 지켜본 나라가 되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 이후 가장 어려운 문제는 포로 송환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포로들이 적지 않았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중립국송환위원회였고, 그 위원장을 맡은 나라가 인도였다. 인도군은 포로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결정을 기다렸다.-본문에서 <사진 황건>

한국전쟁 정전협정 이후 가장 어려운 문제는 포로 송환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포로들이 적지 않았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중립국송환위원회였고, 그 위원장을 맡은 나라가 인도였다. 인도군은 포로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결정을 기다렸다.

최인훈은 <광장>에서 이 역사적 사실을 한 개인의 비극으로 승화시켰다. 주인공 이명준은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제3의 길을 꿈꾼다. 역사 속 인도가 지키려 했던 ‘선택의 자유’는 소설 속에서는 끝내 도달할 수 없는 ‘광장’이 된다.

해설사의 한마디는 오래전 기억 하나를 불러냈다. 1983년, 나는 거제도의 한 병원에서 공중보건의사로 석 달을 근무했다. 병원에서는 산자락이 올려다 보였다. 병원장인 정희섭 원장은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낸 노의사였다. 갓 졸업한 젊은 의사였던 내게 그는 창밖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이 한국전쟁 당시 거제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입니다.”

당시의 나는 그 풍경을 특별한 의미 없이 바라보곤 했다. 젊은 의사에게 그것은 병원 창밖의 평범한 산이었다. 사십여 년이 지난 오늘, 그 산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정희섭 원장은 세상을 떠났고, 이제 나는 그때 그분의 나이가 되었다.

그 산에는 총을 내려놓은 병사들이 있었다. 조국보다 자유를 선택하려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을 묵묵히 지켜본 인도군이 있었다. 그 역사는 최인훈의 <광장> 속에서 문학이 되었고, 나는 반세기가 지난 뒤에야 그 풍경의 의미를 읽게 되었다.

문학은 역사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때로는 기억보다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수십 년이 흐른 뒤 비로소 한 장면의 의미를 밝혀 주기도 한다.

최인훈 작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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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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