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박람회를 국정감사장까지 끌어들인 이웃 동네 국회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감장 앞에서 ‘시장 구속’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행사장에서 “본인을 소개하지 않았다”고 하소연하는 국회에서의 기자회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페킹 오더(Pecking order)란 말이 있다. ‘쪼는 순서’, 서열(序列)을 뜻한다. 동물에서 유래한 말로 닭들은 본능적으로 서열을 만든다. 힘센 놈이 약한 놈을 쪼고, 약한 놈은 더 약한 놈을 쪼면서 위계(位階)를 정하는데 “쪼는 자(者)와 쪼이는 자(者)”, 여기서 존재하는 건 상처다.
인간 세상도 ‘쪼는 현상’이 낯설지 않다. 강자는 약자를, 강대국은 약소국을, 여당과 야당은 서로 부리가 너덜너덜할 때까지 쪼아댄다. 경쟁자를 쪼아 눈을 멀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래야 정치적 생존 가치가 있다고 믿는 환경, 그 끝에는 상처와 분노가 남는데도 그 사실을 ‘쪼는 자만 모르는 사회’가 돼 가고 있다.
순천 역시 예외는 아니다. 쪼는 모습이 볼썽사납다. 시(市) 발전을 위한 예산 확보나 아이디어 제공보다는 틈만 나면 상처를 내는 쪼기가 도(度)를 넘는, 이른바 무소속 시장 쪼기가 애처로울 정도다.
정원박람회를 국정감사장까지 끌어들인 이웃 동네 국회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감장 앞에서 ‘시장 구속’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행사장에서 “본인을 소개하지 않았다”고 하소연하는 국회에서의 기자회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우스스럽다는 단어가 떠오른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요즘 국회의 국정감사가 ‘순천시정감사’라는 비판과 함께 ‘역겹다’는 시민이 늘고 있다.
물론, 위법 사항이 있으면 처벌해야 맞다. 하지만 ‘그냥 쪼는 모습’, 상처를 내는 데 전력을 쏟는 리더의 혈안(血眼)이 크게 보이는 게 순천이다. 경전선 도심 통과 문제만 해도 김문수 의원 측은 노관규 시장이 도심 우회안을 고집해 사업이 지연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노 시장 측은 정치적 왜곡이라고 말한다. 긁어 부스럼이다.
정원박람회 관련 김건희 보고 문제, 소각장 문제도 갈등만 부각된다. 사안을 큰 그릇에 담아서 보는 긍정 마인드보다는 행정이 ‘오버’했다는 비판, 말하자면 “끊기 어려운 줄을 왜 바늘구멍에 넣었느냐”고 따지는 형국이다. 헷갈리는 건 시민이다. 정원박람회 관광객 1천만 명 유치나 코스트코 순천 유치에 대한 긍정 평가가 절하(切下)될 때까지 싸잡아 도매금으로 넘기니, 보이는 건 배가 산으로 가는 모습이다.
정책보다 정쟁이 앞서고 논리보다 모욕이 먼저다. 상생의 언어는 실종되고 시민을 향해 ‘자기 진영이 되길’ 바라는 행동이 가관(可觀)이다. 쪼아서 줄 세우기를 곧 정치력으로 부각(浮刻)시키는 지도력 앞에서 커지는 건 내년 지방선거에 대한 냉소다.
국회는 더한다. 국감장이 국민 분노를 키우는 장소 같다. 자기주장만 난무한다. 욕설이 일상화되고 존경과 상식은 손톱 밑에 든 때다. 여야를 떠나 국민의 의혹을 푸는 국감이 되도록 앞장서야 할 의원들이 막다른 골목이든 드넓은 광장이든 상대를 밀어붙이기에 여념(餘念)이 없다. 잔상(殘像)에 남는 건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권력은 폭력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며, ‘쪼는 사회’는 바로 그 권력의 올바르지 않은 사용, 정당한 권력 부재가 만들어낸 폭력의 일상화”라고 했다.
맞다. 그래서 국민이 힘들다. 정직한 삶이 희석되고 어디에도 내 존재감이 없는 듯하고, 열심히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고 체념과 냉소가 일상이 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벽’은 사실상 ‘쪼는 순서’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사회가 되고 있으니 긍정보다 부정이 앞선다.
노벨상 수상자인 마르케스(‘백년의 고독’ 저자)는 “삶이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게 아니라, 희망이 사라질 때 지친다”고 했다. 지금 국민이 지친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리더들의 갈등으로 자신의 ‘노력’이 인정받을 희망의 통로가 막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서야 한다. 쪼임에 순응하는 순간, 우리는 영원히 닭장 속에 갇힌다. 질서와 위계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을 억누르고 가능성을 차단하는 장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짜 문제는 ‘누가 더 높으냐’가 아니라 ‘누가 먼저 깨어나느냐’다. 상생을 위해 껍질을 안팎에서 쪼는 “깨어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게 바로 ‘줄탁동시(啐啄同時)’다. 불교의 이 가르침은 병아리가 알 안에서 껍질을 쪼는 순간(啐), 어미가 밖에서 껍질을 쪼아(啄)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안팎이 동시에 움직여야 비로소 새 생명이 탄생한다. 안에서만 쪼거나 밖에서만 쪼면 죽거나 상처가 날 수 있다.
“군자는 화합하되 같지 않고, 소인은 같으나 화합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줄탁동시는 ‘같음’이 아니라 ‘조화’다. 생각이 달라도 서로의 깨어남을 돕는 것, 그것이 진짜 협력이다. 지금 순천이나 국회,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이런 동시성(同時性)의 각성이다. 국민이 안에서 깨어날 때, 정부가 밖에서 돕는 사회. 무소속 시장과 여당 의원, 지방과 중앙이 함께 껍질을 깨는 사회. 그때 비로소 새 세상을 향한 변화가 시작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쪼는 순서’에 갇혀 있다. 쪼는 사회는 결국 스스로를 쪼아 먹는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그래서 서열이 아니라 상생으로, 지시가 아니라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 깨어나는 사회는 강요함이 아니라 생각이 달라도 함께 두드릴 때 가능하다.
‘Pecking order’, 상처를 키우는 쪼는 행동은 여기까지다. 우리가 꼭 깨야 할 알은 낡은 위계, 굳은 사고, 선거를 의식한 지나친 치우침, 정파 싸움이다. 말귀를 알아들었다면 볼썽사나운 못된 행동은 ‘여기까지’라고 스스로 “응답하라”, 제발!




본래 정치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요즘 정치꾼들은 국민을 이용해서 개인의 권력이나 명예를 차지하는 수단으로 국민을 불편하게 하네요.
깨어있는 시민들이여 옹졸함으로 쪼는 정치를 일삼는 정치꾼들 투표로 정리해야 하겠네요.
혁신과 화합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 가능한 내일이다.
길을 갈고 망치를 준비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어느 순간 부드러움 앞에 무릎 끓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