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조와 십자가, 그리고 부활’…”세상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행 26:1)
바울에게 자기를 변호할 최후 변론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어쩌면 풀려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런데 이 기회가 주어지자 바울은 자기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의 변론을 다 듣고 난 아그립바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 분명 자기를 변론하라고 준 시간이었는데 바울은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겉으로는 열심히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듣다 보면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언어로 치장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욕망이 꿈틀댑니다. ‘주신 은혜가 감사하다’는 것인지, ‘그 은혜를 받은 내가 잘났다’는 것인지 아리송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 응답으로 둔갑한 자기 자랑을 얼마나 많이 하고 또 듣고 있습니까?
반대로,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 안에 예수님이 녹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직업을 가졌든, 그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자리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를 해도 하나님을 빙자한 자기 자랑이 될 수 있지만, 세상 한가운데서 치열하게 돈을 벌어도 그 인격과 삶에서 예수님이 배어 나올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총독 베스도가 소리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행 26:24)
어쩌면 이 말은 두 가지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첫째는 문자 그대로 바울이 헛소리를 지껄인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자기 변호를 하라고 준 그 소중한 기회를 고스란히 복음을 전하는 데 써버리는 바울이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보고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지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창조와 십자가, 그리고 부활이라는,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두 번째는 그 믿음에 따라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익을 낼 수 있는 기회를 남에게 양보하거나, 손해를 봤는데도 감사를 고백하고, 고난을 선물이라 여기는 삶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계발의 관점에서 자기 부인의 삶은 납득이 안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안타깝게도 다른 의미에서 “당신들 미쳤구나”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 것 같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일반 상식에도 못 미치는 ‘정신 나간 짓’을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들어야 할 목소리는 바울이 들었던 “네가 미쳤구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