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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현대 회장 막내동생 정신영 동아일보 기자의 활약과 비극적 죽음

정신영

정신영(1931~1962)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56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입사했다. 나이 스물다섯의 젊은 기자는 국회를 출입하며 정치 현장의 중심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또래 기자들 가운데서도 성실함과 치밀한 취재 태도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 한국 정치는 6·25전쟁의 상흔을 딛고 새로운 체제를 모색하는 격동기에 있었고, 젊은 기자 정신영은 그 한복판에서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국내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더 넓은 시야와 학문적 깊이를 갈망했다. 1957년, 정신영은 독일 함브르크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경제학 박사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큰형 정주영의 권유와 지원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학문을 통해 사회를 이해하고자 하는 개인적 열망이 강했다. 당시 한국에서 유럽 유학길에 오르는 일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나, 그는 과감히 새로운 길을 택했다.

1957년 독일 유학을 앞두고. 왼쪽부터 김영주, 정상영, 정주영, 정신영, 정인영, 정순영

1958년에는 한국일보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유럽 현장을 누볐다. 벨기에 브뤼셀 만국박람회를 취재했고, 아일랜드를 여행하며 기행문을 보도했다. 당시 기사들은 젊은 언론인의 눈으로 본 유럽의 사회와 문화를 생생히 담아냈다. 이는 단순한 외신 소개가 아니라, 한국 사회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창이 되었다.

1961년, 그는 다시 동아일보 유럽통신원으로 발탁되었다. 학업과 언론 활동을 병행하는 치열한 삶이었다. 그해 8월에는 ‘베를린 위기’를 타전했다. 동서 냉전의 최전선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현장에서 보도한 것이다. 그는 분단된 베를린의 현실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한국 독자들에게 국제 정세의 긴박함을 알렸다.

그러나 불운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1962년 4월, 그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치료를 이어가던 중 장폐색이 발생했다. 의학적 한계 앞에서 젊은 언론인의 삶은 갑자기 멈추어 섰다. 향년 31세. 너무나 짧고 허망한 생애의 끝이었다.

지도교수는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논문이 너무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미완으로 남을 뻔한 그의 연구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제목은 <경제성장에 강제저축이 미치는 영향>.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막 시작하던 시기와 맞물려, 한 젊은 언론인·학자가 조국의 경제발전을 고민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정주영은 동생의 비보를 접하고 큰 충격에 빠졌다. 국내 건설업계 도급한도액 1위를 차지하며 승승장구하던 시기였지만, 그는 열흘 동안 집에 틀어박혀 울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훗날 자서전에서 그는 “좋아한다는 말, 기대가 크다는 말, 자랑스럽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못한 것이 평생 후회된다”고 고백했다. 강철 같은 기업가로 불리던 ‘철인’ 정주영의 눈에서도 끝없이 눈물이 흘렀다.

정신영의 죽음은 한 가정의 비극을 넘어, 한국 언론계에도 아쉬움을 남겼다. 그는 기자로서, 학자로서, 시대를 고민한 지식인으로서 앞으로의 길이 유망했지만,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역사 속 미완의 인물이 되었다.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대표, 김대중정치학교 대외협력본부장,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노조위원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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