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김시림 시인, 시집 ‘나팔고둥 좌표’로 독자와 만난다

김시림 북토크 포스터

김시림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 <나팔고둥 좌표> 출간을 기념해 오는 8월 16일(토) 오후 3시, 서울 금천구청 12층 대강당에서 북토크와 낭송회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미래를 향해 뻗어나가는 땅, 금천에서 김 시인의 작품 세계를 직접 나누고 감상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시인의 육성으로 펼쳐지는 시 낭송과 더불어 독자들과의 교감을 중심으로, 깊이 있는 문학적 사유가 오갈 예정이다.

<나팔고둥 좌표>는 자연과 인간, 고통과 아름다움의 경계에서 울리는 나팔고둥처럼, 독자들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김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시가 삶의 상처와 눈물, 그 이면에 피어나는 언어의 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북토크에서는 시인의 창작 배경과 시에 담긴 시대적 고민, 내면의 여정이 소개되며, 이어지는 ‘금천 낭송회’에서는 문학과 음악이 어우러진 감동의 무대가 마련된다.

이번 행사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참가를 원하는 독자는 행사 당일 현장 등록하거나, 안내된 연락처(010-9054-7555)로 문의하면 된다.

김시림 시인은 인간 내면의 고통과 구원, 그리고 시대적 책무를 노래해온 중견 시인으로, <나팔고둥 좌표>는 그의 시 세계가 한층 원숙해진 결실로 평가받고 있다.

다음은 문학평론가 방민호 서울대 교수의 <나팔고둥 좌표> 시평이다.

1. ‘약한’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세상

시집들 가운데에는 귀를 기울이고 눈여겨보아야만 잘 들리고 보이는 시집이 있다. 애써 주의를 집중하지 않아도 쉽게 들리고 보이는 시집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시집이 따로 있는 것이다. 화자의 목소리가 크거나 높지 않기 때문인데, 이런 시집의 의미나 가치를 헤아리려면 더 차분해지고 침착해져야 한다. 무엇보다 마음에 여유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나지막하면서 은밀한 ‘내포’를 읽어내는 보람, 김시림의 시집 『나팔고둥 좌표』는 그러한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좋은 사례의 하나일 것이다.

『나팔고둥 좌표』의 시들은 소리 높여 이야기하지 않는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단번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충분하다고 예단했던 것보다 한 번은 더 시집 전체를 일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가운데 먼저 포착되는 이 시집의 특성은 화자의 ‘시적 대상’들이 크지도 높지도 않으며, 왕성한 생명력으로 충만해 있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이름하여, 작은 물상들의, 작은 생명체들의 세계, 그러나 그 의미는 결코 작지만도, 얕지만도 않은데, 필자는 먼저 이러한 특성에 유의한다. 표제시인 「나팔고둥 좌표」에서부터 시인의 시선은 크지 않은 물상들, 생명들의 세계를 향한다.

병원 로비에는 뚝 떼어놓은

심해深海 한 조각이 산다

흰동가리와 블루탱과 만다린 피쉬와 샛별돔이

조그마한 입으로 별 부스러기 같은 플랑크톤을 살살 쪼아 먹는다

인공 햇살 손가락들이 모랫바닥까지 파고들고

밤낮없이 공급되는 꼭 알맞은 산소 농도

19병동 112호, 이 병실엔 수시로

폭풍 해일이 몰려온다

작은 수족관 같은 몸속,

어긋난 수치들은 해열제와 인슐린과 전해질과 혈소판 수혈 등으로 즉시 교정된다

스스로 침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당신,

몰래몰래 눈에 보이지 않게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일까

며칠 전 눈대중으로 좌표를 찍어 둔 자리보다

한 뼘쯤 옮겨 앉은

저 나팔고둥처럼

―「나팔고둥 좌표」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병원 로비”에 놓여 있는 “작은 수족관”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흰동가리와 블루탱과 만다린 피쉬와 샛별돔” 같은 아열대 어족들이 한가롭게 노니는 수족관 세상이다. 화자는, 그런데, 이 수족관 세상을 이 병원 “19병동 112호” “병실”에, 그리고 이 “병실”에 누워 있는 “당신”에 중첩적으로 비유한다. “병원 로비”의 “작은 수족관” 세계와 달리 “19병동 112호”에는 “수시로” “폭풍 해일”이 “몰려온다”. 또 “당신”의 “몸속”에서는 수시로 “수치”들이 “어긋”난다. 이 “수치”의 “폭풍 해일”이 “몰려”올 때마다 “해열제와 인슐린과 전해질과 혈소판 수혈 등”이 새로 자꾸만 시도되어야 한다.

「나팔고둥 좌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생명의 모습을 전달한다. 부모나 가까운 친척 어른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시기에 이르면 모두 이 시에서와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다. 화자는 병실의 “당신”을 돌보는 내내 아마도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을 때 로비의 수족관 세상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이 시집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시인의 웅숭깊은 관찰적 시선은 수족관 세상 속의 “나팔고둥”이 날마다 조금씩 위치를 옮겨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옮겨감 속에서 시인은 “몰래몰래 눈에 보이지 않게 어딘가로 가고 있는” “당신”의 ‘현실’을 느낀다. 날마다의 옮겨감,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며칠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위기에 처한 생명의 ‘추이’를 깨달을 수 있다. 생명은 누구나 언제인가는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수족관’ 세계라도 여기에는 언제든 “폭풍 해일”이 예비된 것이다.

2. 위기에 처한 생명들의 ‘총체성’

김시림 시인이 표제시 「나팔고둥 좌표」에서 드러내 보인 작고 약한 생명체의 ‘현실’은 이 시집 전체에 고루 ‘산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봄을 지나다」에서 시인은 “온몸으로 바닷가 축대를 오르고 있”는 “흰점박이꽃무지 애벌레 한 마리”에 시선을 보낸다. “바닷가 축대”이므로, “오르다가 또그르르 굴러떨어지고” “또 오르다가 떨어지”는 “애벌레”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다. 시인은 이 “애벌레”의 모습에서 자신의 현실을 함께 깨닫는다. “오래전 봄을 지나온 나는” “어디만큼 왔을까” 하는 독백은 자신의 생명적 상황 또한 “애벌레”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의 소산이다.

또, 「러브버그(Love Bug)」는 “꼬리를 맞대고 날아다니는 붉은등우단털파리”를 ‘노래’한 것이다. “일 년을 애벌레로 살고서야” “날개”를 얻은 그네들은 인간들이 뭐라 하든 “남은 생” “사나흘”을 그네들의 생명의 ‘존속’을 위한 행위에 몰두한다. 모든 생명체는 개체의 생명의 ‘단속’을 통해서만 그 ‘연속’을 지켜갈 수 있는 역설적 존재다. ‘러브버그’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은 이 ‘러브버그’를 가리켜, “대자연”은 “나와 다르지 않은 저 생명 또한 공들여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작은 존재들을 통해 생명 전체의 운명적 상황을 들여다보는 것, 이는 시집 『나팔고둥 좌표』의 중요한 창작방법이다. 간밤에 내린 비로 “수양버들” “가지”에 맺힌 “물방울 음표”들을 통해서 위기에 처한 “어머니”의 생명을 생각하고, 이로부터 “물방울들”의 “생”의 운명을 생각하는 「물방울의 한 생」, “새벽 등산로”에서 “흙길을 배밀이하고 있”는 “달팽이 한 마리”로부터 “느릿느릿 제 갈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생”의 섭리를 직시하게 되는 「느릿느릿」, “코발트빛 영덕 앞바다”에서 만난, “항해를 다 마친 늙은 배 한 척”에서 “요양병원 침대에 정박해 있는 사람들”의 운명을 떠올리는 「흔들리는 뱃전」, 바닷가에 떠밀려 온 “검은 해양 부표 하나”로부터 “암에 끌려갔다는 그 사람의 부고”를 ‘읽어내는’ 「표류」 같은 시들.

「물방울의 한 생」, 「느릿느릿」, 「흔들리는 뱃전」 같은 시들에서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위태롭고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생명의 위태로움과 위기는 시집 전체에 걸쳐 고루 나타난다. 「입추 무렵」에서 시인은 “거리공원 나무 아래” 떨어져 있는 “매미”를 가리켜, “숙제 다 마치고” “껍데기만 남은 몸”이라 한다. 이 “매미”는 “몸의 절반 이상을 텅 비워” 이미 “발음기로 써버”렸고, “단 한 번의 짝짓기”를 지상에 남기고 떠나버렸다. “아침 햇살이 나무이파리 그늘천으로” “수의를 빚고 있다”라고 한,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생명의 필연적 귀결로서의 죽음을 인식하는 시인의 세계인식을 잘 보여준다.

「이제 그의 소리는 없다」에 나타나는 “매미”는 “산자락 오솔길”에 뒤집힌 채 “죽을힘을 다해 회오리”치고 있다. “말벌”이 “제 몸보다 큰 매미에게 독침을 놓”은 것이다. “말벌”이 죽은 “매미”를 끌고 바쁘게 사라진 후 “숲”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기만” 하다. “이 세상은 인정사정없는 먹이사슬인가”라는 이 시의 마지막 시행은 이 시에 나타난 “매미”와 “말벌”의 이야기가 일종의 ‘우화’처럼 세계상황을 지시하는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우화’적 기능을 잘 보여주는 다른 한 편의 시를 제시해 볼 수도 있다.

어디로 가는 길이었을까

산자락 비포장도로, 납작하게 죽어 있는 뱀

바퀴가 밟고 간 웅덩이

깨진 물거울이 울고 있었어

길모퉁이 돌아

아파트 공사로 사라져 갈

오래된 마을

낙엽 빛깔 네발나비가 삼잎국화꽃에 앉아

비단실 가는 다리로

양 날개를 오므렸다 폈다 골똘히 꿀을 빨고 있었어

머지않아 불도저에 깔려

길도 논밭도 나무도 집도

마을 따라 사라질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은 것 같았어

돌아오는 길

웅덩이에 빠진 내 발도 흠뻑 젖고 말았어

―「삼잎국화꽃에 앉은 네발나비」 전문

이 시에서 시인, 곧 화자는 어딘가로 가는 “산자락 비포장도로”에 있었고, 거기에는 “뱀”이 “납작하게 죽어 있”다. 그것은 무심코 지나간 자동차 바퀴에 깔려 버린 것일 수도 있다. 화자는 “뱀”이 죽어 있는, “바퀴가 밟고 간 웅덩이”를 “깨진 물거울”이라 하는데, 그것은 마치 죽음의 현실을 비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 “길모퉁이”를 돌아가면 “아파트 공사로 사라져 갈” “오래된 마을”이 어떤 묵시록의 현실처럼 가로놓여 있다. 이제 화자의 시선은 이런 풍경 속에서 “삼잎국화꽃”에 앉아 무심하게, “양 날개를 오므렸다 폈다 골똘히 꿀을 빨고 있”는 “네발나비”를 향한다. ‘그’는 “머지않아 불도저에 깔려” “길도 논밭도 나무도 집도” “마을 따라 사라질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네발나비”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세계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지 못한다. 다만 당장 눈앞의 달콤한 “꿀”에 몰두할 뿐이다. “돌아오는 길/ 웅덩이에 빠진 내 발도 흠뻑 젖고 말았어”라는 화자의 마지막 ‘독백’은 죽어 있는 “뱀”과 그 ‘옆’에서 무심하게 꿀을 빨고 있는 “네발나비”의 우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자’의 ‘당혹스러움’을 나타낸다.

“인류세”(「러브버그」)의 생명들을 둘러싼 ‘현실’은 조금만 더 나아가면 ‘전락’과 ‘소멸’에 처할 것만 같은데, 생명들, 사람들은 이를 의식하지 못한다. 『나팔고둥 좌표』의 시들은 이와 같은 생명적 현실을 시인만의 독특한 ‘총체적’ 우화로써 드러내 보인다. 이 시집의 ‘총체성’은 사회적 현실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생명적 현실의 ‘총체성’이다. 필자는, ‘총체성’이란, 표면적 현상에 초월적 본질이 삼투되어 나타나는 양상을 가리키는 용어일 것이라 이해한다. 『나팔고둥 좌표』의 시들이 보여주는 작고 연약한, 위태롭고, 위기에 직면한 생명들의 모습은 시인이 생각하는 생명적 현실의 총체성을 담지한다.

다음과 같은 시도 『나팔고둥 좌표』의 ‘총체성’을 잘 대변해준다.

밤나무 이파리 밥상을 통째로 먹다가

몸이 빠진 자벌레 한 마리

바람의 물결 따라 발버둥칩니다

의지할 것은 직접 뽑은 실오라기 한 줄뿐

제 몸으로 한 뼘 한 뼘

평정하던 길이 끊겼습니다

필사적으로 제자리 돌아가려는 저 수직의 몸짓

줄 한번 탁 놓아버리면

곧장

모두가 제집일 텐데

방하착放下著,

참 어렵나 봅니다

―「수직의 몸짓」 전문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 시에 나타나는 “자벌레”와 같이, ‘생명적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바람의 물결 따라 발버둥”치는 존재들인 것이 아닐까. “방하착放下著”이란, 주지하는 바, 마음속 집착과 번뇌를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는 것이 우리들 생명 가진 존재들의 ‘무명無明’의 상황일 것이다.

3. ‘자연-생명’을 위협하는 ‘개발’에의 위화감

이렇듯이, 『나팔고둥 좌표』의 시인의 ‘현실’은 무엇보다 ‘자연-생명’이 겪어나가는 ‘삶’ 자체의 ‘현실’이다. 이 시집에는 김시림 시인이 출생에서 성장에 이르기까지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음을 보여주는 시들이 많다. 예를 들어, 「돌김 세 톳」은 시인의 고향이 바닷가임을 말해준다. “겨울이면” “집집마다 김을 했었다”는 것이다. 시인은 김을 ‘하는’ 구체적인 과정을 생생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발장 위에 네모난 틀을 대고

물김을 쫙 뿌릴 때마다 작은 바다가 하나씩 생겨났다

양지바른 건장에

집안 내력이 담긴 액자처럼

빼곡히 걸리던 김들

「돌김 세 톳」 4~5연

“물김”을 “뿌릴 때마다” “작은 바다”가 생겨났다는 표현, “돌김”을 “작은 바다”로 치환해서 표현할 수 있는 감각은 유소년 시절에 얻어진 것이라 할 것이다.

또한 시인이 저 윤선도와 김남주와 황지우 시인의 세상인 해남 하고도 대흥사를 노래한 작품은 이 시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를 간직한 시이기도 하다.

낮은 돌담 두른 전통 한옥 유선관

붉은 벽돌로 우뚝 솟은 굴뚝이

먼저 손을 맞는다

피안교彼岸橋 아래쪽

기와지붕을 얹은 정자에 앉아

막걸릿잔을 기울이는데

붉은 생을 통째로 내려놓는 동백꽃들

두 손 가득 모아

계곡물에 풀어준다

살아오는 동안

내가 품었다가

혹은 나를 품었다가

떠나가던 이별처럼

바위에 부딪히며 멀어져 가는 저 꽃송이들

―「대흥사 가는 길목에서」 전문

대흥사 가까운 계곡 정자에서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붉은 생”을 다한 “동백꽃”을 “계곡물”에 “풀어” 보내는 멋스러움과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서정은 ‘바다’와 ‘계곡’이 그에게 선사한 ‘원초적’ 자질이요 감정일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나팔고둥 좌표』에는 시대와 시속을 따라 변모해 가는 삶의 양태들 가운데, 특히 성급하고 강제적인 ‘개발’, ‘재개발’ 과정에 대한 위화감을 엿보이는 시들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 모과 한 알」, 「파란 양철지붕 집」,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가재길 58」, 「가재길 77」 등이 이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이 시들에서 시인은 재개발을 앞두고 철거하거나 이장移葬에 예정된 곳들에 가 있으며, 그곳에서 미처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물상들, 사람들에 시선을 던지고 있다. 「모과 한 알」은 “분묘들의 이장 안내판” 곁에 남아 있는 모과나무를 노래한 것이고, 「파란 양철지붕 집」은 “산비탈”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양철지붕 집을 노래한 것이다. 이 집에서는 “한 씨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는 “공사 중인 석정공원”을 돌아보며 그곳의 “금지 문구”와 “위험물”의 존재를 부각시킨 것이다. 「가재길 58」과 「가재길 77」은 “가재산” 넘어가면 나오는 “가재길”에 남아 있는 집들을 노래한 것이다. 「가재길 58」은 “파란 양철지붕 집”에 살던 분이 “일흔다섯 한미숙 할머니”였음을 알게 해준다. 「가재길 77」은 “등이 휘도록 잡동사니를 실은 트럭”이 떠나고 난, 빈 집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들의 독특한 표현법은 공사 현장, 철거 ‘현장’에 게시된 공고문들을 ‘인유법’으로 직접 가져와 제시한 것이다. 시인은 여러 작품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 떠난 옛 삶의 터전의 상실과 허무를 날카롭게 부각시킨다.

(가)

본 분묘는 평택 가재지구 도시개발구역에 편입되어 이전해야 하므로 연고자께서는 확인하여 주시기 바라며 연락이 없을 때는 무연분묘로 개장할 예정입니다

―「마지막 모과 한 알」 5연

(나)

위험물 저장소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전문

(다)

신규 영농 절대 금지, 경작 시 별도 통보 없이 공사 예정, 평택 가재지구 도시개발사업조합

―「가재길 77」 7연

시들에서 이탤릭체로 표시된 인공의 게시판, 공고문, 푯말들은 재개발을 진행시키는 행정적 ‘권력’의 존재를 부각하면서 남아 있는 물상들, 사라진 사람들의 존재를 이에 대비시킨다. “모과 한 알”(「마지막 모과 한 알」), “강아지풀 나팔꽃 개망초 쇠비름” 같은 “야생 풀꽃”들(「관계자 외 출입 금지」), “잡초에 가려진 문패”, “뜯겨 나간 부엌문”, “동굴처럼 어두워진 부엌에 속을 다 드러낸 채 모로 누워 있는 외짝 냉장고”, “저물녘 허공에 긴 연기 풀어 수신호를 보내던 굴뚝”, “개망초꽃 새하얀 묵정밭”(「가재길 77」) 같은 ‘자연’의 물상들, ‘자연’에 가까운 삶의 흔적들은, 무심하고 무자비하기까지 한 행정적 ‘명령’들과 확연히 대비된다. 철거와 재개발이 진행되는 그곳은, 꼭 그렇다고만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더라도 더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과 그네들의 정든 물상들이 공존했던 곳이다.

‘공간’(space)과 ‘장소’(place)라는 말을 구별해서 사람들의 경험이 혼재된 낯익은 곳을 ‘장소’라고 했던 서양 비평가의 말을 빌리면, 이들은 ‘장소적’인 곳이었다. “단단한 모든 것들은 공기 속으로 녹아 사라지고야 만다.”(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라고 했던 ‘무자비’한 ‘현대성’의 원리는 시인이 늘 함께 하던 ‘장소’들의 사람들과 물상들의 존재를 허물고, 새롭게 나타날, 낯선 미지의 공간 구획에 존재의 ‘권리’를 이양하게 한다. 시인은 이 원리를 모를 수만은 없으되, 깊은 ‘위화감’을 수반하지 않고는 이 원리가 관철되는 과정을 감내하기 어렵다.

다음의 시에 나타나는 “허망”함은 단지 “한 씨 할머니”의 것만 아니라 시인 자신의 것이라 해야 한다.

산비탈 마지막 양철지붕 집

재개발 굴착기에 찌그러져 나뒹굴고

수십 년 사람을 품고 살던 그 집은

입구도 출구도 형체마저 지워지고 말았다

낯선 곳에서 따로따로 와서

끈끈하게 일가를 이루던

한 씨 할머니가 살던 시간과

벽돌과 철근 장독대와 고무대야가

서로 뒤엉켜 꺼져가는 체온을 나눈다

해마다 까치와 나눠 먹던 홍시를 매단 채

뽑혀 나간 감나무, 깊게 파인 구덩이를 보며

이렇게 허망한 일이 어디 있냐며

연신 눈시울을 적시는 할머니

백로白露 지난, 찢어진 마당귀에

스스로 파종한 나팔꽃이 연둣빛 만장을 내걸었다

―「파란 양철지붕 집」 전문

4. ‘상실’을 넘어 서로 양육하는 생명들의 “숲”으로

『나팔고둥 좌표』의 마지막 남은 문제라 생각되는 것은, 그렇다면 이 세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일 것이다. 이 시집에 은은하게 흐르고 있는 감정은 떠남과 이별의 상실감이다. 이 시집의 화자들은 정든 곳, 정든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져 현재에 서 있다. 어느덧 삶의 봄날들은 계곡물을 따라 흘러내려 간 동백꽃처럼 멀어져 버렸다. 자신은 지나간, 멀어진 삶의 시간들을 의식하며 현재의 삶을, 그리고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을 어떻게든 ‘영위’해 가야 한다. 시집에서 이 상실감은 무엇보다 정든 사람으로부터의 떠남으로 나타난다.

물 위에 뜬 연꽃 같다는 무섬마을

따로따로 흐르던

내성천과 서천이

이곳에 와서

몸을 섞는데

부딪치며 깨진 물의 상처들

하얀 피를 토해낸다

물에 닿을 듯

물에 잠길 듯

가을 외나무다리 아래

금빛 물살 가르는

저 송사리 떼처럼

당신의 슬하에서 맘껏 유영했던 나

홀로 물가 모래밭 걷는다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우리가 아니어서

두 개의 발자국만이 나를 따라온다

―「두 개의 발자국은 어디로 갔나」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지금 영주 “무섬마을”에 와 있다. “무섬마을”은 “물 위에 뜬 연꽃 같다”고 하는 이름난 마을이다. 화자는 이곳에서 “내성천”과 “서천”이 따로 흘러와 이곳에서 한데 어울린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 사실은 하나의 은유가 되어 화자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사랑의 사연에 사로잡히게 한다. “부딪치며 깨진 물의 상처들”이 “하얀 피를 토해낸다”는 이 시 4연의 고통스러운 이미지는 화자 자신의 감춰진 사연에 연결된다. “당신의 슬하에서 맘껏 유영했던 나”는 지금 “홀로 물가 모래밭 걷는다” “당신”과 “나”는 “이제는 우리가 아니”다.

다음의 시에서도 화자는 바닷가에 서서 어딘가로 날아가는 “갈매기”를 보며 사랑의 상실의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

(나)

갈매기 한 마리가 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무엇을 찾아가는 길일까

사람들 마음엔 생각 프로그램이 담겨 있어서

160센티미터도 안 되는

이 작은 몸에도 네게로 가는 길이 있다

가만히 있어도

그리로 간다는 것은

반질반질 길이 나 있다는 것

한아름의 그리움이

별빛과 싸락눈과 새소리와 천둥번개로 쌓인

그 길 위에 서면

나는 그만, 하늘과 심장 맞대고 한 호흡하는

먼바다 외줄 수평선

내 몸이 심하게 출렁거리는 날

돌아오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는

가깝고도 먼 길

―「이토록 가깝고도 먼」 전문

이 시에서 사랑의 상실은 삶의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길”의 상실에 연결된다. “160센티미터도 안 되는/ 이 작은 몸에도 네게로 가는 길이 있다”라는 화자의 고백은, 잃어버린 사랑이 화자에게 미친 파괴적 영향을 나타낸다. “길”은 ‘너’를 향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길”은 사라져 버렸다. “돌아오는 길”은 ‘가깝고도 멀다’. 사랑의 상실이 가져온 파괴적 영향을 시인은 「청둥오리의 물갈퀴질」에서는 “오리”에게서 “물 위에 뜨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다는 체념적 고백으로도 나타낸 바 있다.

“당신”, “너”와의 이별이 선사하는 고통의 깊이는 다음의 시에서 가장 선명한 표현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등포에서 기차를 타고 옥천에 간다

옆자리에 꽁지머리 총각이 앉았다가

수원역에서 내리고

한참 빈자리로 가다가

빨간 머리 여자가 타고 내린 후

또 혼자다

너와 헤어지고 나서

문득문득 아려오던 명치

옆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우고 또 비우며

같이, 또 따로

종착역까지 가는 여정이다

―「또 혼자다」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다시 “길” 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영등포”에서 “옥천”으로 가는 철로 역시 하나의 ‘길’일 것이다. 화자의 옆자리는 아무 인연 없는 사람으로 채워졌다 비워진다. 이 의미 없는 교체와 교대 속에서 화자는, “또 혼자”가 된다. 그리고 “너와 헤어지고 나서” 겪었던 사랑의 고통을 ‘반추’한다. “문득문득 아려오던 명치”는 사랑의 고통의 ‘육체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시들에서 시인이 감추면서 드러내는 어떤 깊은 사연들을 감지한다. 『나팔고둥 좌표』의 화자는, 자연에 가까운 존재로서 이 세상에 나와, 그 자신에게 할당된 삶의 길을 자기대로 살아내야 하고, 그러면서 시시각각 소멸을 향해 나아가며 생명의 이법을 절실하게 자각한다. 이러한 화자에게 ‘사랑’은 어쩌면 삶을 이어가야 할 절대적인 근거이자 “지지대”(「지지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내 맘속 그물 집 한 채」는 “통유리 밖 찢어진 거미줄에” “겨우내 걸려 있는 거미 허물”를 보며 “너의 흔적이 걸려 있는” “그물 집 한 채”를 생각한다. 그 집은 그렇게 직접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달빛도” “별빛도” “이슬방울처럼 잘게 부서져 반짝이던 집”이었다. 그것은 “거미”집이라기보다 사실은 화자 자신의 집이었다.

‘사랑’의 고통은 깊고 길다. 이 ‘사랑’은 『나팔고둥 좌표』의 화자에게 깊은 흔적과 상처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감추어진 사랑, 멀리 사라져버린 사랑, ‘옳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화자는 자신의 ‘길’을 새롭게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시인 자신에 대한 자각을 함축하고 있는 재미있는 표현의 시다.

둥글래 한됫박 육처넌

두통빈열기침애조은 구기자, 정력언기애 산수유, 눈애조은 결맹자, 간심장애조은 허깨나무열매, 개피……

뿌리로 온 것

껍질로 온 것

열매로 온 것

씨앗으로 온 것

길바닥 콘크리트 좌판 앞에서

물과 햇살을 나누며 서로를 양육한다는 숲을 생각하네

나도 저들처럼 작은 선물로 와서

이 지구 행성 좌판에 명찰을 내걸고

무수히 시행착오 해가며

삐뚤빼뚤, 오타투성이로 살고 있네

―「삐뚤빼뚤 팻말」 전문

“삐뚤빼뚤”이라는 시어는 「가재길 77」에서 “붉은 스프레이로 ‘공가’”라고 쓰고 “삐뚤빼뚤 그려놓은 동그라미”라고 표현하는 데서 한 번 나왔었다. 이 “삐뚤빼뚤”이 자연의 삶을 훼손하고 침습하는 “삐뚤빼뚤”이었다면, 이 시에서의 “삐뚤빼뚤”은 자연의 이법, 삶의 이법을 가리키는 “삐뚤빼둘”이며, 삶의 원리를 가리키는 “삐뚤빼뚤”이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사연을, “저들처럼”이라는 시어가 보여주듯이, 자신을 포함한 타인들, 다른 생명적 존재들의 삶의 원리가 펼쳐지는 사례의 하나로서 받아들인다. “무수히 시행착오 해가며” “삐뚤빼뚤, 오타투성이로 살고 있네”라는 마지막 표현은 삶에 대한 시인의 깊은 성찰이 바탕이 되었기에 재미있고도 아름답다. 이 성찰에 따르면 “나” 또한 “저들처럼 작은 선물로” “이 지구 행성”에 와, 그 “좌판”에 “명찰을 내걸고” 살아가고 있다. “길바닥 콘크리트 좌판”에 놓인 “뿌리로 온 것”, “껍질로 온 것”, “열매로 온 것”, “씨앗으로 온 것”들과 ‘나’는 같은 존재의 하나이며, “물과 햇살을 나누며 서로를 양육한다는 숲”을 이루는 “지구 행성”의 한 식구, 일원이다.

누구나 “삐뚤빼뚤” 살아간다. “오타투성이”로 살아갈 것이다. 누구나 어머니를 잃고 “당신”의 생각을 떠올리며(「생각을 심다」), 가슴 아픈 생의 마지막 사랑의 순간을 겪으며(「커튼 너머」), “햇살 숟가락을 놓아버린 지 오래인 갈참나무 한 그루”(「햇살 숟가락」)처럼 스스로 또한 조락해 가며, 자신의 삶의 시간을 감내하며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게 된다.(「당신의 서랍장」) 『나팔고둥 좌표』는 시의 본래적 기능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별나지 않고 가파르지 않은 그의 시들은 ‘시적인 세계’가 어떻게 성립되고 창조되는지 가늠해 보게 한다.

시란 참 신묘하다. 세상이 이렇듯 소란스러운데도 일단 시의 세계로 들어서면 전혀 ‘별세상’이 ‘따로’ 열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별세상’은 넓고 깊고 그윽하다. 언어의 분량이 많지 않은 데도 그 자체로 ‘무궁무진’한 하나의 세계, 그것이 바로 시의 세계다.

시를 쓴다는 것은 한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좋은 시는 이 ‘무궁무진’한 한 세계의 ‘열림’ 그 자체라 할 것이며,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 ‘열림’을 향해 감각과 감정의 촉수를 내미는 일이다. 일찍이 정지용은 시의 오묘함을 가리켜 ‘바다’는 연잎처럼 오므라들고 펴진다고 했다. 여기서 ‘바다’란 곧 ‘시’ 그 자체이며, 이 ‘바다’가 우리를 향해 오므라들고 펴진다 함은 ‘시’와 우리의 교섭과 교감을 가리킨다. 김시림 시인의 『나팔고둥 좌표』의 편편 시들을 읽으며, 필자는 이 교섭과 교감의 보람, 기쁨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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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아시아엔 기자,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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