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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볼만한 곳] 구룡령 옛길에서 길의 의미를 되새기다

구룡령 <사진 신정일>

명승으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옛길 가운데 하나인 구룡령 옛길을 걸었다. 2005년, 서울 남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걷기 단체인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발족식이 열렸고, 그해 문경새재에서 제1회 길 문화축제를 개최했다. 이듬해 열린 제2회 길 문화축제에서는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길을 문화재나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자’는 운동을 주창했다.

당시 세미나 발제자로는 지도학의 권위자인 성신여대 양보경 교수, 우리 땅 걷기 이사장인 필자, 문경새재 옛길박물관의 안태현 학예연구사, 문화재청 이위수 과장, 그리고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이 참여했다.

필자는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발제를 했다. “오래된 큰 나무는 천연기념물이 되고, 낡은 집은 보물이나 민속자료로 지정되며, 악기 하나만 잘 다루어도 문화재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오천 년 역사 속에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옛길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언젠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길이 새롭게 조명받는 이 시대에, 우리나라의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옛길을 문화재나 명승지로 지정하자.”

그 행사에서는 길 위에서 삶을 살아간 보부상들의 행렬을 처음으로 재현했으며, 영남대로와 함께 나라의 동맥이었던 삼남대로가 지나는 전주나 삼례 지역에 ‘삼남대로 옛길박물관’을 만들자는 제안도 내놓았다.

행사를 지켜본 일부 참석자들은 “길이 문화재가 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때 필자는 “길은 길대로 의미가 있다. 한 번 두고 봅시다”라고 답했다.

이듬해인 2007년, 문화재청으로부터 “어떤 길을 문화재로 지정하면 좋을지 추천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필자는 역사 속에서 의미를 지닌 열 곳의 길을 추천했고, 이 가운데 여섯 곳이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된 길은 다음과 같다. 영남대로 상의 문경새재, 영남대로의 관갑천 잔도, 우리나라 최초의 길인 충주의 하늘재, 영주의 죽령 옛길, 양양의 구룡령 옛길, 강릉과 평창을 잇는 대관령 옛길…

당시 “길이 문화재가 될 수 없다”고 말했던 이들이 필자에게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하셨느냐”고 묻기도 했다. 필자는 “오천 년 역사 속에 켜켜이 쌓인 길이 문화유산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이후 필자는 ‘길의 날’ 제정을 위해 국회와 협력하며 노력을 기울였고, 장세환 국회의원의 발의로 관련 세미나도 열렸다. 하지만 법 제정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때 묻지 않고 아름다운 옛길은 어디일까. 바로 구룡령 옛길이다.

어수리꽃

구룡령 옛길은 양양과 홍천을 잇는 길로, 조선시대 양양·고성 지방 사람들이 한양으로 향할 때 이용하던 고갯길이다. 산세가 험한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과 달리 비교적 평탄해 선호되었으며, 강원도 영동과 영서를 잇는 주요 교역로로 기능했다. 과거 급제를 기원하며 선비들이 이 길을 넘었고, ‘구룡령’이라는 명칭도 아홉 마리 용이 고개를 넘다 약수터에서 쉬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문화재청은 이 길을 역사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명승 제29호로 지정했다. 과거 사대부들과 신랑신부가 가마를 타고 넘던 혼례의 길이자, 영동과 영서를 잇는 가장 짧은 고개였다.

길을 오르며 문득 떠오른 것은 정현종 시인의 시다. “짐이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 생각하라. 얼마나 무거워야 가벼워지는지를.” 산이 높아질수록 가벼워진 나무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정상 표지판이 나타나고 명계리까지는 아직 멀다. 능선길에는 키 작은 조릿대가 나그네를 반기고, 긴 계단을 따라 내려서자 ‘여기는 구룡령 정상입니다. 해발 1013m’라는 도로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 기다리던 버스가 보이기도 한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 괴테의 말이다. “그리움의 뜻을 아는 자라야 나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 버스는 그런 마음을 남긴 채 떠났다.

그리움을 안고 찾아왔고, 그리움을 품은 채 돌아가는 길이었다.

장마 속 폭우로 고생하는 이들을 떠올리며 미안한 마음으로 걸은 구룡령 옛길은 어느새 추억이 되었다.

구룡령 신정일

신정일

문화사학자, '신택리지' 저자, (사)우리땅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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