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인생의 무게를 견디는 방식…욥, 사울왕, 다윗의 경우

욥은 자신이 겪어야 했던 어마어마한 고통들, 그 의미에 대한 질문을 가슴 한켠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굽이굽이에서 발견되는 퍼즐 조각을 차곡차곡 모아, 하나님의 큰 그림을 천천히 맞추어 가며 남은 여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중략) 사울 왕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내지 말아야 할 힘을 냈고, 그 순간부터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힘을 내면 낼수록 힘이 들었습니다.(중략) “나(다윗)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다윗에게 이 힘은 가상의 힘이나 심리적 효과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살면서 느껴본 가장 강력한 힘이었고 그의 삶이 증명한 실재입니다. 사진 출처 박노해 시인의 <길>

욥기 42장

우리는 상실과 피해를 수량화하는 데 익숙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건물에 화재가 나도 피해 규모 00억 원, 자연재해를 입어도 피해 규모 00억 원, 정신적 피해 보상 판결도 0천만 원 등 이런 식의 환산과 환원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그 돈이 있다고 모든 피해가 원상 복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치와 수량으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숭례문을 겉보기에 아무리 완벽하게 재건했다 하더라도 절대로 재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욥기의 결말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욥 42:12)

결과만 놓고 보면 욥은 잘 풀렸습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재산이 생겼고 또 다른 자녀들도 생겼습니다. 140년 동안이나 장수하며 자손 4대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욥이 과거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었을까요? 욥은 자신의 고난이 완벽하게 해결되었다고 느꼈을까요?

먼저 떠나보낸 자식들의 얼굴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도대체 내 인생에 왜 그런 일이 생겼던 것일까’ 그는 풀린 듯 풀리지 않은 질문들을 가슴 한켠에 깊이 묻어 두고 남은 여생을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욥기를 읽고 ‘고난을 통과한 욥의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로 결론 내린다면, 그건 욥기의 맥락에서 많이 벗어난 결론입니다. 욥기의 마지막 장에서 욥이 마주했던 것은 구체적인 해답 풀이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이고도 거대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욥이 절규 속에서 던졌던 간절한 질문들에 하나님은 하나도 대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욥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셨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문제가 풀리기보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품는 여유가 욥에게 생겼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이 해답에 대한 조급함을 누그러뜨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삶을 조망하는 또 다른 시야를 제공합니다. 욥은 자신이 겪어야 했던 어마어마한 고통들, 그 의미에 대한 질문을 가슴 한켠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굽이굽이에서 발견되는 퍼즐 조각을 차곡차곡 모아, 하나님의 큰 그림을 천천히 맞추어 가며 남은 여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답을 주시기보다 답 없는 인생을 견딜 힘을 주십니다. 문제를 풀어 주시기보다 문제를 품는 법을 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18편

작은 힘이라도 있어야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게 돈이든, 실력이든, 권력이든, 인맥이든. 힘이 있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힘은 늘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힘을 갖게 되면 우리 내면에 일종의 환상이 생깁니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 앞으로도 늘 이렇게 벌릴 것 같습니다. 주식이 오르면 더 오를 것 같습니다. 어떤 자리에 올라가면 그 위가 또 보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면 계속 좋아해 줄 것 같습니다. 인간은 힘이 생기면 그 힘이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미래를 그립니다. 일종의 관성력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관성력’이란 존재하지 않는 힘입니다. 관찰자의 착각에 의해 마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가상의 힘이 관성력입니다. 그러나 관성력을 느끼는 동안에는 그것이 가상의 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 힘이 정말 느낌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방향의 힘, 다른 사람들이 내는 힘, 그런 힘들에 부딪혀서 내가 처음에 가졌던 힘이 상쇄될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상태를 두려워합니다. 내 힘이 0에 도달하는 상태 말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힘을 씁니다. 힘을 유지하기 위한 힘입니다. 그 힘은 어디선가 빌려야 하는데, 빌려다 쓰는 힘은 빚입니다. 대출을 대출로 막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지 말아야 할 빚을 내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듯이, 빚을 내듯 힘을 내는 순간부터 인생이 복잡해집니다. 끊을 수 없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사울 왕의 인생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모릅니다. 내지 말아야 할 힘을 냈고, 그 순간부터 사울의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힘을 내면 낼수록 힘이 들었습니다. 그가 냈던 것은 힘이 아니라 빚이었기 때문입니다. 왕권을 담보로 낸 빚이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힘이었지만 나중에는 갚아야 할 빚이었습니다.

내 삶에 힘이 빠질 때, 힘이 없을 때, 무슨 힘을 가지고 빠진 힘을 메우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힘 없는 다윗에게 힘을 보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대항하는데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아기스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기회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다른 힘의 공급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다윗에게 이 힘은 가상의 힘이나 심리적 효과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살면서 느껴본 가장 강력한 힘이었고 그의 삶이 증명한 실재입니다.

석문섭

베이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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