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사람이 선택한 신들

사사기 10장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가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삿 10:14)
인간이 순수하게 무신론자가 될 수 있을까요? 완벽한 무신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야 하고, 선과 악의 모든 디테일을 본인이 결정해야 합니다. 도덕과 윤리를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야 하는데,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가 우연의 산물이라면 인신매매가 수산물매매보다 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신이 없는 자리는 무(無)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결국 또 다른 신이 들어섭니다. 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그저 신이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다른 것을 놓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신이 없는 자리에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무언가를 가져다 놓습니다. 과학, 이성, 논리, 돈, 권력, 명예, 인기, 이념, 신념 등 이 모든 것들이 다 신 대체제입니다. 신이 없다는 논리의 신격화, 이것이 무신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신론은 자기 수준의 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제거한 자리에 자기 수준의 신을 갖다 놓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너희가 선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보아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번 해보라고 하십니다.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직접 가서 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과연 구원이 있을까요? 결국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는 막다른 길에 다다르고 맙니다. 위버멘쉬(Übermensch)가 되든가, 이데올로기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위버멘쉬를 이야기한 니체는 위버멘쉬가 되었습니까? 인류 역사에 등장한 이데올로기들은 과연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변화시켰습니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보았지만 아무런 응답도 듣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신을 선택하는 방식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이란 신이 인간을 선택하는 사건임을 일관되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부르시고 찾아오시는 것이 참된 구원의 시작입니다. 갈대아 우르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바울은 자신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잠깐묵상 오디오듣기)
https://youtu.be/2LVlHCxhzXk?si=LjdesP1J_NNrn1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