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잠깐묵상] 돈과 기득권 앞에서 죽어가는 양심

죽음에 접촉된 자는 오직 생명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본문 중)

민수기 19장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은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민 19:16)

구약 율법은 죽음과 접촉하는 것을 부정하다고 간주합니다. 시체를 만지거나 무덤과 접촉이라도 하면 부정해집니다. 이 부정한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결 의식을 거쳐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시체를 만질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현상과 다양한 방식으로 접촉하며 살아갑니다. 사회 곳곳에 사망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망의 그늘에서 소멸과 소모, 소진을 경험합니다. 구약적 표현을 빌리자면, 부정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죽음의 현상 속에 살아가고 있을까요? 돈과 기득권 앞에서 수많은 사람의 양심이 죽었습니다. 공허한 재미만을 추구하다가 의미가 죽어 갑니다. 공동체는 어떨까요? 공동체가 점점 죽어 가며 핵개인이 출현했습니다. 이 시대의 정의는 어떻습니까? 살아 있습니까?

사람들은 일어나고,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잠들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른 채, 돈을 벌고 소비하며 살아갑니다. 자극적인 정보와 콘텐츠를 탐닉하며, 더 강한 자극을 원합니다. 생각하기보다 생각당하며 삽니다.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것 아닐까요? 충족되지 않는 욕구만이 살아 있는 좀비처럼 말입니다.

민수기 19장에 의하면 사람은 부정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 접촉한 자는 붉은 암송아지의 재가 섞인 물을 통해서만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결 의식에는 두 가지 역설이 존재합니다. 죽음에 접촉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부정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상 대신 죽는 쪽은 붉은 암송아지이고, 부정을 짊어지는 쪽은 제사장입니다.

이 율법의 원리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3-14)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 접촉되어 괴사되어 가는 우리를 끊어 내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의 피를 수혈해서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어 가던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죽음에 접촉된 자는 오직 생명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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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섭

베이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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