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에 조정은 거의 속수무책이었고 고려를 부마국이라 하며 사실상 지배해 왔던 원(元)나라 역시 쇠퇴해 가는 처지여서 고려를 도와 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어느 한 군데 의지할 곳이 없어 늘 불안한 가운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때 소년 최무선은 나라의 광흥창을 관리하고 관리들의 녹봉을 담당하던 그의 아버지(최동순)의 괴로워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처지에서 왜구들을 혼내주고 퇴치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획기적으로 강력한 수단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 관직에 기용된 최무선이 조정에 건의하여 우왕 3년(1377)에 화통도감(火?都監)이 설치되었다. 여기서 최무선은 화약제조를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연구와 실험을 거듭했다. 당시 화약제조기술을 보유한 나라는 원(중국)뿐인데 그 나라는 그 기술이 국외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보안을 유지하며 엄히 단속하고 있어 고려는 원으로부터 완제품(화약)을 수입하여 ‘불꽃놀이’에나 쓰는 형편이었다.
마침내 최무선은 유황과 염초와 숯을 섞어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실험을 거듭한 결과 화약제조기술을 터득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폭발사고로 맏아들을 잃었다. 이렇게 해서 생산한 화약은 비록 원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폭발력이 엄청나게 강하여 이를 무기화 하면 왜구들을 퇴치하는데 큰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화통도감에서는 이 화약을 전장에서 쓸 수 있도록 무기화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오늘날의 지뢰나 대형 투척무기 같은 폭발물도 만들었으며 나아가 화약을 사용하는 총통(포)도 만들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최무선이 크게 활약했음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고려조정이 쇠퇴해 진 틈에 내륙에까지 깊숙이 들어왔던 왜구들이 화약폭발물과 총통 등 요란한 폭음을 내는 새로운 무기에 놀라 달아나기에 바빴다.
우왕 6년(1380) 8월에 개성의 조정으로 운송할 세곡을 약탈하려고 왜선 100척이 진포(전라도)에 침입했다. 이때 원에서 고려에 귀화한 나세(羅世)가 심덕부, 최무선 등과 함께 화포를 장착한 선단을 이끌고 왜구를 무찔렀다. 혼비백산한 왜구들은 이후 고려의 해안에 범접하지 못했다(진포대첩).
화통도감에서의 화약무기 연구?개발은 그 후 조선왕조에서도 계속되어 선조 25년(1392)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화약을 사용한 총통들이 수군의 거북선, 판옥선 등에 장착되어 그 위력을 발휘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의 연전연승의 원동력이 되었고 내륙에서도 한강하류의 행주산성 방어전에서 권율 장군의 대승에도 크게 기여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 온 최무선?최해산(둘째 아들) 부자의 창의와 끈질긴 노력의 결실은 이렇게 값진 것이었다. 그의 아들 최해산은 조선 개국 직후 지난날 그의 아버지 최무선의 화약무기 개발과 왜구퇴치에 기여한 공로가 높이 평가받아 태종1년 3월 군기시(軍器寺) 주부로 특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