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산훈련소로 떠나던 친구들, 기차 지붕에 올라간 한 청년…반세기 가까이 풀리지 않은 생사의 기억
1977년 11월 1일. 꼭 49년 전 오늘이다. 아침 일찍 중학교 동창들의 단체대화방에 메시지 하나가 올라왔다.
“오늘이 77년 11월 1일, 동창들 거의 다 군대 가던 날이네. 성동구 병역자원들이 왕십리역에서 논산훈련소로 떠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최영주의 글이었다. 곧이어 다른 친구들이 입대 날짜와 근무 부대, 전역 날짜를 적어 올렸다. 한 친구는 보병 35사단 통신대에서 근무하다 1980년 7월 22일 제대했다고 했고, 염정현은 태릉 71훈련단에서 7월 24일 전역했다고 했다.
49년 전 날짜를 이렇게 정확히 기억하는 친구들이 있다니. 그들의 짧은 대화가 내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왕십리역의 한 장면을 불러냈다.
1977년 11월 1일, 서울 왕십리역에는 논산훈련소로 떠나는 입영 장정들과 가족,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천호동과 송파 일대에 살던 1957년생 청년들이 대거 입대하는 날이었다. 역 주변에는 족히 2천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날 입대하지 않았다. 친구 전종권과 최인호 등을 배웅하러 나갔다. 누군가는 아들과 작별하고, 누군가는 친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전날부터 술을 마신 청년들도 있었고, 대낮부터 술기운이 오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웃음과 고함, 눈물과 노랫소리가 뒤섞였다. 군사정권 아래 젊은 남자들에게 군대는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였다.
당시 왕십리역에는 전기로 움직이는 열차가 다니고 있었다. 입영열차의 출발 시각은 오후 1시 반인지 2시인지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다만 출발을 앞둔 그 무렵 벌어진 일만큼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어느 순간 한 청년이 열차 지붕 위로 올라갔다. 술기운이었는지, 객기였는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저 쳐다보았다. 그런데 청년이 전기가 흐르는 설비에 닿은 듯했다. 몸이 갑자기 굳어졌고, 지붕 위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옷이 타들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래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지만 누구도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전원을 차단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볼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 기억으로는 20분 가까이 지났을 무렵, 청년의 몸이 열차 지붕에서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열차는 예정된 시간에 떠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군대로 향하는 청년들은 객차에 몸을 실었다. 훗날 그날 입대한 친구들에게 들으니 기차 안에서는 헌병들이 신병들에게 군기를 잡았다고 했다. 이른바 ‘두더지 잡기’ 같은 가혹한 방식도 있었다는 것이다. 왕십리역에서 일어난 사고 이야기도 열차 안에 퍼졌다고 했다.
그 시절은 그랬다. 군대에 가는 것 자체가 인생의 큰 사건이었지만, 정작 젊은이 한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지금의 눈으로 당시의 모든 상황을 재단할 수는 없겠지만, 그날 열차 지붕에 매달려 있던 청년을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이듬해인 1978년 봄, 나는 대학에서 소설가 이범선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다. <오발탄>을 쓴 바로 그 작가였다. ‘국어작문’ 강의로 글쓰기 수업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수필을 한 편씩 써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날 왕십리역에서 목격한 일을 소재로 삼았다. 제목은 ‘라일락 필 무렵’이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착안한 제목이었다. 입영열차가 떠나던 11월의 풍경을 이듬해 봄 라일락이 피는 계절에 다시 떠올리며 쓴 글이었다.
이범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각자 쓴 글을 앞에 나와 읽도록 하셨다. 내 차례가 되어 수필을 읽었는데, 뜻밖에도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어떤 대목에서 왜 웃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선생님의 말씀이 오래 남았다.
“참 좋은 제목입니다. 좋은 글은 다른 사람의 글에서 배워도 됩니다. 처음에는 모방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계속 베껴 써서는 안 됩니다. 좋은 글을 모방하면서 자기 글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정확한 표현까지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뜻만큼은 잊지 않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자기 언어로 남기는 일이라는 것을 그때 조금 배웠다.
세월은 흘렀다.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여러 나라의 전쟁과 재난, 사건과 사고를 취재하면서도 왕십리역에서 본 그 청년의 모습은 가끔 불쑥 떠올랐다.
그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사고가 난 날 저녁 뉴스에서 그 청년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사람이 있었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20년 이상 흐른 어느 날, 천호동에서 살던 친구를 우연히 만나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 친구 살아났다고 하던데.”
순간 귀를 의심했다. 고압전기에 감전된 사람이 살아남았다는 것인가. 믿기 어려웠지만 믿고 싶었다.
다만 어느 쪽도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다. 사고 당일 저녁 뉴스에 사망 소식이 나왔다는 말도, 나중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말도 전해 들었을 뿐이다. 당시 신문이나 방송 기록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내가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청년이 열차 지붕에 올라갔고, 감전된 듯 움직이지 못하다가 아래로 떨어졌다는 사실뿐이다.
기자로 살아오며 가장 경계했던 것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단정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오래된 사건 하나는 아직도 결말을 알지 못한다. 그날 그 청년의 이름도, 이후의 삶도 모른다.
1977년 11월 1일 왕십리역에서 논산훈련소로 떠난 친구들은 이제 모두 일흔을 바라본다. 어떤 친구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어떤 친구는 병마와 싸우고 있으며, 또 어떤 친구는 손주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날 군복을 입으러 떠났던 청년들이 저마다 한평생을 살아온 것이다.
오늘 아침 동창들의 단체대화방에서는 입대 날짜와 전역 날짜를 서로 확인하며 웃었다. 그들에게는 젊은 날의 추억이지만, 내게는 그날의 사고가 함께 떠오른다.
49년 전 왕십리역. 떠나는 열차, 손을 흔들던 가족들, 술기운에 떠들던 청년들, 그리고 지붕 위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던 이름 모를 젊은이.
그는 살아남았을까.
나는 지금도 그가 살아남아 어디선가 자신의 1977년 11월 1일을 기억하고 있기를 바란다. 어쩌면 그날의 일을 손주들에게 들려주며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왕십리역에서 큰일 날 뻔했지.”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1978년 봄 이범선 선생님에게 제출했던 ‘라일락 필 무렵’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글을 쓰게 했던 한 청년의 모습은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글은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다. 때로는 한 사람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채, 그가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까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