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의사가 오기 전에는 부모가 있었다…루크 필즈의 두 그림이 전하는 돌봄의 의미

영국 화가 루크 필즈(1844~1927)의 1875~1876년 작품 홀아비(The Widower). 아내를 잃은 아버지가 병든 아이를 품에 안고 슬픔에 잠겨 있다. 가난과 상실 속에서도 이어지는 부모의 돌봄을 보여준다. 호주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주립미술관 소장.

지난여름 시드니의 뉴사우스웨일스주립미술관(Art Gallery of New South Wales)을 찾았다. 여러 작품 사이를 걷다가 한 그림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영국 화가 루크 필즈(Luke Fildes)의 <홀아비(The Widower)>였다. 1875~1876년에 그려진 작품이다.

그림 속에는 아버지와 아이들이 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이 곁에 앉아 있다. 특별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약을 먹이는 것도, 의사를 부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이와 함께 있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에서 보았던 필즈의 또 다른 그림이 떠올랐다. 1891년에 그려진 <의사(The Doctor)>였다. 15~16년의 시간이 흐른 뒤 필즈는 다시 아픈 아이를 그렸다.

루크 필즈의 1891년 작품 ‘의사'(The Doctor). 의사가 밤새 병든 아이의 곁을 지키는 동안 부모는 불안한 마음으로 아이의 회복을 기다린다. 의료인의 헌신과 부모의 사랑을 함께 담은 작품이다. 영국 런던 테이트 브리튼 소장.

이번에는 아이 곁에 의사가 앉아 있다. 부모는 뒤에서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의사는 밤새 아이를 지켜보는 듯하다.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림 속 의사는 특별한 치료를 하고 있지는 않다. 그 역시 아이 곁에 앉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두 그림을 나란히 떠올리자 한 가지 질문이 생겼다. 의사가 오기 전에는 누가 아이를 돌보았을까? 당연히 부모였다.

아이의 아픈 곳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도 부모이고, 열이 나는 밤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는 사람도 부모다. 기침이 심해지면 밤잠을 설치고, 아이가 토하면 옷을 갈아입히고,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다음 날 병원에 데려간다.

특히 한부모 가정이라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한 사람의 몫이다. 아이들이 여럿이라면 더하다. 한 아이가 아프고 나면 다른 아이가 아프기도 한다. 감기와 열, 기침과 복통 같은 잔병치레만 반복되어도 부모가 감당해야 하는 시간과 노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어릴 때는 그것을 특별한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많은 부모가 그렇게 살았다. 형편이 어려워도 아이가 아프면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의사에게 데려갔다. 약값을 걱정하면서도 아이에게 필요한 약은 사주었다.

그러나 정작 부모 자신이 아프면 달랐다. 약 한 봉지 사 먹지 않고 참고 견디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의 병은 부모가 돌봐야 할 일이었고, 부모 자신의 병은 참으면 되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아무도 특별한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머니도 그랬다. 내가 아프면 형편이 어려워도 어떻게든 의사에게 데려갔다. 그러나 자신이 아플 때는 약도 사 먹지 않고 견디곤 했다.

그때는 몰랐다. 이제 의사가 되어 환자를 바라보면서야 그 의미를 조금 알 것 같다. 환자가 아이일 때 의사는 아이만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이를 둘러싼 가족의 걱정까지 함께 만난다. 아이의 병으로 밤을 지새운 부모가 있고, 아이의 열을 몇 번이나 재보았을 부모가 있다. 병원비를 걱정하면서도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도 있다.

의사는 그 돌봄을 대신할 수 없다. 부모가 이미 해오던 돌봄에 잠시 합류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홀아비>와 <의사>는 서로 떨어진 두 작품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홀아비>에서는 아버지가 아이를 돌본다. <의사>에서는 의사가 그 곁으로 들어온다. 하나는 의사가 오기 전의 돌봄이고, 다른 하나는 의사가 찾아온 뒤의 돌봄이다.

물론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약을 처방하고, 치료하고, 수술하고, 때로는 생명을 구한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의사도 그저 환자 곁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부모가 이미 알고 있던 일이다. 아픈 사람 곁에 있는 것. 손을 잡아주는 것. 밤을 함께 보내는 것. 괜찮아질 때까지 떠나지 않는 것. 어쩌면 돌봄의 가장 오래된 형태는 의학이 아니라 곁에 있음인지도 모른다.

필즈는 두 작품에서 그 모습을 그렸다. 한 번은 아내를 잃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또 한 번은 환자 곁을 지키는 의사의 모습으로.

그리고 시드니에서 <홀아비>를 바라보던 나는 오래전 런던에서 보았던 <의사>를 다시 만났다. 두 그림 사이에서 어린 시절의 어머니도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다. 아이가 아프면 어떻게든 의사에게 데려가면서도 자신이 아프면 그저 참고 견디던 그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의사가 오기 전에는 부모가 있었다. 그리고 의사가 떠난 뒤에도 아이 곁에는 여전히 부모가 남는다. 어쩌면 의사가 하는 일은 그 오래된 돌봄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잠시 함께 앉아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필즈의 두 그림은 나에게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돌봄은 의사에게서 시작되지 않는다. 의사는 이미 시작된 돌봄에 합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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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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