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일암에서 배운 관세음보살의 가르침, 그후 7년
동로마제국이 천사의 성별을 놓고 논쟁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천사는 남성인가, 여성인가.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상황에서도 그런 논쟁에 매달렸다는 풍자다. 실제로 콘스탄티노플 함락 직전에 그런 논쟁이 벌어졌다는 역사적 근거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무엇이 중요한지 잊은 사회를 꼬집기 때문이다.
요즘 이 이야기가 자꾸 떠오른다. 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전을 걱정해야 할 때, 대법원장 탄핵을 비롯한 정치적 논쟁이 관심의 중심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면서다. 물론 민주주의에서는 사법부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먼저 살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천사의 성별을 따지는 동안 성벽 밖의 위협을 놓치는 것은 아닌가.

문득 오래전 여수 향일암에서 만난 관세음보살이 생각났다.
인도에서 남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던 관세음보살은 중국을 거치며 여성과 어머니의 모습으로도 그려졌다. 신앙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구원자에게 기대하는 모습도 달라진 것이다. 힌두교의 신 비슈누가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여러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는 것을 아바타라라고 한다면, 불교의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처지에 맞추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응신의 존재다.
사람들은 왜 관세음보살을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렸을까. 아마도 고통받을 때 자신을 꾸짖는 존재보다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품어주는 존재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의 부처다. 죽음 이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 반면 관세음보살은 현세의 고통 속에서 부를 수 있는 이름이다. 불길 속에서도, 물에 빠져서도, 두려움에 떨면서도 사람들은 관세음보살을 찾는다. 물론 부처와 보살의 역할이 현세와 내세로 엄격하게 나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신앙 속에서 관세음보살은 지금 이 순간의 부르짖음을 들어주는 존재로 다가온다.
2019년 여수에서 학회가 열렸을 때였다. 학회가 끝난 뒤 향일암을 찾았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가파른 바위길에는 물이 고여 있었고, 겨우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도 있었다. 내려오는 사람을 만나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관음전에 도착하자 문화해설사가 물었다. “여러분은 여기 올라오시면서 관세음보살을 만나셨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가 설명했다. 바위길에는 일곱 개의 돌문이 있었고, 그곳을 지나려면 고개를 숙여야 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가는 길에서는 내려오는 사람을 위해 기다려야 했다.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 그것이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기도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남편의 승진을 빌기보다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남편에게 누룽지를 끓여 먹이고 출근시키겠다고 다짐하는 편이 더 좋은 기도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남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하기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그날 나는 관음전의 불상보다 그 여성 해설사에게서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보았다. 7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억은 생생하다.
국가의 안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위험이 닥쳤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구해주기만 기다릴 수는 없다. 먼저 위험을 살피고, 맡은 일을 다하고,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정치적 논쟁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지금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잊지 말자는 것이다.
동로마제국의 천사들은 남성이었을까, 여성이었을까. 그보다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성벽 밖의 위험을 누가 살피고 있었는가.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사람은 많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울부짖음을 듣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쩌면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특별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위험을 먼저 알아차리고, 다른 사람의 부르짖음을 듣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7년 전 여수 향일암의 돌산 꼭대기에서 한 여성 해설사에게 배운 것을 이제야 다시 생각한다. 관세음보살을 만나려면 꼭 불상 앞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 좁은 길에서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순간, 이미 그곳에 계셨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