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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아버지는 왜 소련에 억류됐나…문용식씨가 20년 추적 끝에 찾아낸 기록 ‘억류문제(抑留問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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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식씨가 2026년 8월 2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억류 체험자·유족과 이야기하다’ 토크세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뒤 소련에 억류됐던 고 문순남씨의 아들 문용식씨는 2026년 8월 23일 일본 도쿄에서 한인 강제동원과 소련 억류 피해에 관한 가족의 기억과 자신이 확인한 기록을 정리해 발표했다. 그의 아버지는 1924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인 1945년 관동군 소속으로 선양에서 소련군에 체포된 뒤 카라간다 제99수용소에 억류됐다가 1949년 귀환했다. 문씨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인 2005년 한일협정 문서 공개를 계기로 흔적을 찾기 시작해 일본 정부와 러시아 외교부 등에 자료를 요청했고, 약 20년에 걸쳐 포로수용 기록과 귀환 관련 문서 등을 확인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아버지 개인의 고통을 넘어 당시 약 1만 명의 한인이 소련에 억류됐고 상당수가 장기간 귀환하지 못했던 역사를 마주했다. 아시아엔은 한 가족의 기억이 국가 기록과 만나 역사가 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강제동원·억류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기록 보존 문제를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문씨의 인사말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1. 한인(韓人) 억류(抑留) 피해자 가족의 기억(記憶)

존경하는 여러분
오늘 가족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機會)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한 사람의 이름에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아버지 문순남(文順南)입니다. 일본식 이름은 미나미하라 준난(南平順南)입니다. 제가 가족으로서 기억하는 일과, 훗날 문서와 자료를 통해 확인(確認)한 일을 구분(區分)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 1924년 8월 15일 경기도(京畿道) 개풍군(開豊郡)에서 태어났습니다.

문용식씨 부친(고 문순남, 오른쪽). 유일하게 남은 사진으로 휴전 후 54년 1월~58년 1월 육군 1사단에서 복무 중 촬영한 사진. <사진= 문용식 제공>

1945년 6월 일본군에 강제동원 되었고, 8월 18일 관동군 소속으로 선양에서 소련군(蘇聯軍)에 체포되고, 카자흐스탄 카라간다(Karaganda) 99수용소에 수감(収監)되어 3년이 넘는 억류 생활을 겪은 뒤 1949년 4월에야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을에서는 아버지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겪었는지 가족에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귀환(歸還) 뒤에도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지주(地主)에게 고용되어 농사(農事)와 노동(勞動)을 하며 살았고, 기침을 많이 했는데 병원(病院)에 갈 형편도 되지 않아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1974년 봄(春)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경찰(警察)이 집을 찾아왔고, 남겨진 가족의 생활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어머니는 농촌(農村) 마을을 다니며 행상(行商)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자녀(子女)들이 할아버지에 관해 물었지만, 해줄 말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미안한 마음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2. 아버지(父親) 흔적(痕跡) 찾기

2005년 한일협정(韓日協定) 문서가 공개되고 강제동원(強制動員) 피해 접수가 시작되면서, 아버지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조금씩 열렸습니다. 정부 산하(傘下) 위원회는 ‘소련군(蘇聯軍)에 체포(逮捕)된 한인(韓人) 명단에서 아버지가 일본식(日本式) 이름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다는 사실(事實)을 알려 주었습니다. 몇 줄의 기록이었지만, 아버지의 이름이 처음으로 가족 밖의 기록(記錄) 속에서 다시 나타났다는 점에서 저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매일신문 보도

저는 그 기록을 근거(根據)로 일본 후생노동성(厚生勞動省)에 일본군 동원 기록과 공탁금(供託金) 자료를 조회(照會)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보존(保存)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노동후생성 자료

그렇다면 러시아에서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2007년 외교부에 아버지의 억류(抑留)와 노동(勞動)에 관한 자료를 요청(要請)했습니다. 약 2년 동안 계속 문의(問議)하고 독촉(督促)한 끝에 러시아 당국(當局)의 공한(公翰)과 국가기록원에서 포로 목록(目錄) 카드를 입수(入手)할 수 있었습니다.

그 자료를 통해 아버지의 억류 장소와 수용소 이송(移送), 귀환 과정을 확인(確認)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4월, 비밀(秘密)이 해제(解除)된 포로조사 문서 5매(枚)를 받았습니다. 그 문서에는 청년(靑年) 시절 아버지가 직접 쓴 자필서명(自筆署名)이 있었습니다. 그 서명을 보는 순간, 저는 처음으로 청년 시절의 아버지를 만나는 듯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병들고 지친 모습이었지만, 문서 속에는 자신의 손으로 서명(署名)을 남긴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기록이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소련군에 붙잡힌 청년과 귀환 뒤 가족을 위해 살아간 아버지의 삶을 이어주는 흔적(痕跡)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가 찾고 있던 조사기록을 한국 정부가 이미 보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흔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기록이 가족에게 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3. 한인(韓人) 억류자(抑留者)들의 귀환(歸還)과 정착(定着)

아버지의 기록을 따라가면서, 이 일이 아버지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확인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억류된 한인은 약 1만 명이었고, 약 7천 명은 한인 신분이 확인되어 일찍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약 3천 명은 소련 각지(各地)의 수용소에서 생활하다 귀환을 위해 극동(極東) 지역 수용소로 집결(集結)했습니다. 남한(南韓) 출신 약 500명은 북한(北韓) 지역에서 조사를 받은 뒤 38선 인근까지 이동해 걸어서 남한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귀환이 고통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군과 경찰에 붙잡혀 다시 수용소로 옮겨졌고, 방첩기관(防諜機關)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후에도 소련에 체류(滯留)했다는 이유로 감시 대상이 되었고, 이동할 때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저는 그것 역시 전쟁(戰爭)과 냉전(冷戰)이 남긴 또 하나의 피해(被害)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확인한 1945년 8월 16일 자 극비(極秘) 문서에는 포로들을 소련 영내(領內)로 이송(移送)하고, 군(軍)과 NKVD(內務人民委員部)가 관리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통해 억류가 한 사람에게 우연히 닥친 일이 아니라, 국가(國家)가 기획(企劃)하고 관여(關與)한 행정절차(行政節次)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오랜 시간 억류(抑留)되어 노역(勞役)을 겪었으며, 귀환한 뒤에도 감시(監視)와 사회적 냉대(冷待)를 견디며 살았고 병든 몸으로 가족을 남겨두고 떠난 문순남이라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4. 발언(發言)을 마치며

이 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양국 정부는 청구권협정에 따라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입장(立場)을 취해 왔습니다. 일본 정부도 2010년 외무성 답변서에서, 종전(終戰) 뒤 많은 사람이 정당한 이유 없이 소련에 억류된 일은 인도적(人道的), 국제법적(國際法的)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밝히고,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에 대해 반성과 사죄의 뜻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청구권협정과 국적 요건 등을 이유로 한국인 피해자(被害者)에 대한 임금(賃金)과 피해 보상 지급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혀 왔습니다. 유족인 저는 종전(終戰) 후 발생한 억류문제를 청구권협정(請求權協定)만으로 모두 해결된 일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기록으로 피해 사실이 확인(確認)되었는데도 피해자와 유족에게 필요한 지원과 보상 문제가 풀리지 않은 현실(現實)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양심(良心)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추모(追慕)가 진정한 기억(記憶)이 되려면 이름을 부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이름 뒤에 남아 있는 고통(苦痛)과 유족(遺族)의 마음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본의 시민사회(市民社會) 활동가(活動家) 여러분께 정중히 부탁(付託)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인 억류 피해에 관한 자료와 증언에 계속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아직 알려지지 않은 피해자의 이름을 찾아 주시고, 기록이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保存)하여 다음 세대에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관심이 추모와 기록에 머무르지 않고, 피해자와 유족에게 필요한 지원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미뤄진 보상(補償)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논의(論議)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와 같은 시간을 겪은 분들도 모두 각자의 이름과 가족, 꿈과 삶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분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숫자(數字)를 외우는 일이 아니라, 그분들이 한 사람으로 존재(存在)했다는 사실을 인정(認定)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청(傾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억류 피해자와 유가족께 깊은 위로(慰勞)와 존경(尊敬)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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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식

‘2차대전 후 옛소련 억류피해자’ 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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