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3일] 나치가 ‘야수’라고 비난한 일본의 난징 대학살

2002 부시대통령, 김대통령에 전화 ‘여중생사망’ 직접사과

2002년 12월13일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미군 궤도차량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과 관련, “깊은 애도와 유감(deep sadness and regret)의 뜻을 전한다”고 직접 사과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유사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해 미군 수뇌부로 하여금 한국측과 긴밀히 협조하도록 지시했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이와 함께 북한의 핵시설 동결 해제 선언에도 불구, 한미간 긴밀한 공조 하에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기로 했다고 임성준(任晟準)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밝혔다.

이날 통화에서 부시 대통령은 “미국민들은 한국민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으며 한미 동맹관계의 중요성도 잘 알고 있다”고 밝혔고, 이에 김 대통령은 “우리국민이 이제는 부시 대통령의 진의를 이해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1962 서울 창신동 사창가에 화재. 이 재민 800명

1962년 12월13일 밤 10시40분께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 430번지 청계천변 사창가 판자촌 박성숙씨 입에서 불이 나 120개 동 159 가구가 전소, 817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대형 화재사고가 발생했다.

불은 박씨 집에 세들어 살고 있던 최순애(당시 19세)씨가 촛불을 켜놓은 채 잠을 자다가 촛불이 판자벽에 옮겨 붙으며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 추산 피해액은 당시 돈으로 약 40만원이다.

불이 난 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차 10여대는 소방도로가 없어 진화가 거의 불가능했고, 이에 따라 판잣집들은 속수무책으로 불이 번졌다. 경찰은 박씨를 윤락행위단속법 위반으로, 최씨는 중실화협의로 구속했다. 이재민들은 근처 청계극장에서 오랜 기간 지내야 했다.

1937 일본의 잔인성, 난징(南京) 대학살

난징대학살 당시 무자비한 살륙을 저지른 한 일본 군사가 자신이 죽인 중국인의 시신 옆에서 밝게 웃고 있다.

1937년 12월13일부터 6주 동안 양쯔강 남안의 난징 전역에서 ‘난징(南京) 대학살’이 자행됐다.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톈진, 베이징 등을 점령하고 마침내 12월13일 난징 대학살의 서막이 시작된다.

무차별 사격, 생매장,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는 등 잔인한 학살방법은 모두 동원됐다. 여자들은 소녀, 노파 할 것 없이 무차별로 강간당한 뒤 살해됐고, 젊은 남자들은 총검술훈련으로 베어졌다. 오죽하면 독일의 나치조차도 ‘야수의 행위’라고 비난했다.

일본의 일간 신문에는 ‘중국인 참수(斬首)시합에 참가해 106명과 105명을 참수’한 두 소위의 사진과 찬양기사가 실렸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이 30여 만 명. 당시 난징의 총 인구는 70여만 명이었다. 인구의 절반 가까이를 죽인 것이다.

12월10일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중지나방면군(中支那方面軍) 사령관의 공격 명령을 신호탄으로 일본군 6개 사단 20여만명은 3개 방면에서 난징을 향해 진격해 들어간다. 결사항전을 외치던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3일 전 이미 충칭(重慶)으로 탈출한 상태였다.

12월13일 마침내 난징은 함락되고 대학살의 서막이 시작된다.

마쓰이는 전후 도쿄극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처형됐으나 일본인들은 그를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과 함께 ‘순국칠사(殉國七士)’로 추앙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우익들은 이 사건을 ‘20세기 최대의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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